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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전편에서 Y와 K를 맞이하기 위해 터미널 4에서 터미널 3으로 이동한 우리지만, 시간을 조금 되돌릴 필요가 있겠다. 끔찍하게 맑고 더운 날이었으며 덕분에 하늘은 불가피할 만큼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낮게 날고 있는 구름도 인상적이었다. 원근감은 오롯이 그들의 손에 놓여 있었기에 구름의 양과 무게에 따라 때로는 하늘이 낮아지기도 했고 때로는 더 높아지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 머리 위에 커다란 천을 펼친 다음 그 표면에 역동적인 영상을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아니, 비행기를 타고 늦은 밤 마닐라의 허름한 공항 터미널에 내리던 순간까지도 이번 여행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냥 고속버스를 타고 교통체증이 심한 고속도로를 달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온 기분이었다. 그런 내가 고국에서 한참 떨어진, 그러니까 비행시간으로 다섯 시간이나 떨어진 이국땅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늘의 변화 덕분이었다. 하루 동안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차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이유도 하늘을 보며 여행 기분을 내기 위해서였고 말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숨 막힐 듯한 체온 증가와 따끔거리는 피부의 고통, 그리고 절로 땀이 배는 티셔츠 따위를 감당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런 날씨는 며칠 후 돌아갈 고향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이 그대로 이어질 게 뻔했다. 여기선 외국이라고 위안할 수라도 있지 돌아가면 무엇으로 버틴단 말인가. 한국의 기후가 이곳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적나라한 현지의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B는 밤에 저런 데를 혼자 다니면 안 된다고 일러주었고, 총기가 허용되는 나라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주장엔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식상한 고층 빌딩보다 더 눈길을 끈 대상이 저 거리에, 저 녹슬고 기울고 나른한 거리에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워낙 짧기도 했지만, 곧 나는 이 도시를 제대로 여행하지는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번 나들이는, 그러니까 멤버십 트레이닝이었다고.






  하늘에 반한만큼 저 꼬질꼬질하면서 동시에 알록달록한 색에도 반했다. 자꾸 눈길이 갔다. 이번엔 저 거리를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제약 때문인지 갈망이 더 커졌다. 위험하다는 말은 저 멀리에 있는 형체처럼 나와는 상관없이 보였지만, 그 윤곽이 너무도 선명해 무시할 수는 없는 신기루 같았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가만히 차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내가 기꺼이 저 길로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움은 뒤늦게 마닐라에 도착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잠시 잊혔다. 초점도 안 맞고 흔들린 사진이지만, 꼭 붙여넣고 싶었다. 얼마나 반갑고도 반가운 표정인지 상이 흐릿해도 그 기쁨이 전해진다.






  서로 엇갈린 자리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까 더 보기 좋다. 담배를 정말 피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않아서 정말 보기 좋다. 내가 없어서 너희끼리만 친한 거 같지만, 진짜 진짜 보기 좋다.

  이 사진의 구도가 마음에 든다. 일행의 얼굴도 절묘하게 가려졌고.






  마닐라 국제공항 터미널3은 터미널4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컸다. 우선 건물이 지향하는 바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배낭 여행자는 터미널4에 더 많긴 했지만, 이곳에서도 우린 떠날 사람과 도착한 사람,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배낭보다는 캐리어가 더 어울리는 그런 여행자들로 말이다.






  예컨대 이런 분 같은. 어쩐지 이탈리아에서 오셨을 듯한 느낌이다. 선글라스로 더위를 해체하고 담배로 짜증을 휘발시키는 완벽한 포즈에 할 말을 잊을 정도다. 나를 포함해 D, Y, K, B가 함께 외국 땅을 밟은 이 순간을 기념하면서 나는 여행에서 사람 구경만큼 - 그리고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만큼 -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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