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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아주 오랫동안 여행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지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한다는 흔히 쓰이는 말이 최소한 나에겐 해당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는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다. 여행이라는 라벨을 붙인다면 그건 번지수를 착각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 혼자 다니다 보면 생각의 양이 엄청나게 줄어든다. 그저 끊임없이 혼잣말을 반복하고 뭔가를 끊임없이 느끼기만 할 뿐이다. 마치 영사기의 빛을 쬐고 있는 하얀 스크린처럼. 세상은 나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덧씌우지만, 남는 흔적이라고는 먼지 몇 줌뿐이다. 물론 나중에 회상하면 몇 줄이라도 쓸 거리가 생기긴 하지만, 당장은 기대만큼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내가 다섯 명이 같이 간 여행에서 부득불 한 시간이라도 혼자 다니겠다고 한 이유엔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얻어가는 게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는 염려도 있다. 그 미심쩍은 예감은 차를 타고 오가며 보았던 거리 풍경 속에 잠깐이라도 두 다리를 딛음으로써 불식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도시에 가서 더러운 벽을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여행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사실 왜 하필 더러운 벽인지는 쓰면서도 잘 모르겠다.





  B의 사무실이 있는 마까빠갈의 어딘가부터 걷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검은색 우산을 사야 했을 만큼 지독스러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처럼 우산을 쓴 사람이나 수건을 뒤집어쓴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누구나 피부가 더 검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똑같나 보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황량한 주변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유원지로 가야 할 길을 잘못 든 것처럼 보이는 마차 한 대를 만났다. 해변까지 태워준다고 했는데 정중히 거절했다. 지나치게 눈에 띌 거라고 지레 질색해서다.





  마닐라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프니다. 아주 많은 깡통을 기워 만들고 스피커에선 힙합이 나올법한 외관이었다. 햇살 아래 가만히 놔두면 시뻘겋게 변할지도 몰랐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어서 빨갛게 달아오른 버스가 시내를 관통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시외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갈수록 나를 빼고는 타지 인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실은 누군가의 출신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음양의 대비가 너무 강해 사진이 잘 나오지 않겠다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사진상에선 퇴폐적으로 화사하며 만들어질 때부터 낡았을 것만 같은 분위기가 전혀 살지 않았다. 필름 카메라라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과격할 햇살 아래서라면, 글쎄.





  편의점에 들러 제일 싼 생수 한 병을 사서 마셨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골목을 기웃거리는데 저만치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판이 보였다. 대국이라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마닐라의 치안에 대해 안 좋은 소문들은 더 가까이 다가갈 용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벽이나 찍었다. 이 벽을 보는 순간 체증이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화창한 날이었는지 유리창으로 반대편 거리가 선명하게 다 보인다. 수많은 이미지가 겹쳐 어지러워진다.





  저 작은 창이 열리고 누군가 고개를 내밀어 식어 빠진 음료수를 건네주는 상상을 한다. 보기만으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닫혀있는 느낌이지만, 또 모를 일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창구는 열려 있었을지도, 지금은 누군가 저 안에서 꿀 같은 단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난 콜라를 좋아한다. 특히 제로 코크를 좋아한다. 얼음을 띄워 마시면 일종의 탄산 차를 복용하는 기분이다. 탄산음료의 부작용에 관해선 온갖 자료가 널려있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이렇게 뜨거운 도시에서는 청량감을 얼마나 보장하느냐가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나는 콜라를 곁들여 경단 꼬치 비스무리한 음식을 먹는 남자의 사진을 보며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세상을 지배하는 많은 기업이 있다. 자비 없는 거대 자본과 획일화를 우려하면서도, 그중 몇몇 브랜드는 절대로 등지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파란색 트럭과 초록색 자전거. 컬러풀한 도시다. 서울이 여섯 개 들이 크레용 상자라면, 이곳은 전문가용 서른두 개 들이 물감 상자랄까.





  내가 좋아하는 형용사 중 '아련하다'가 있다. 이 한없이 모호해서 여행만 갔다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주로 날 사로잡은 장면을 묘사할 때 쓴다. 사실 상황과 장면마다 적확한 단어가 다르다는 걸 안다. 문제는 가용한 단어의 얄팍함이다. 온갖 쓰레기를 종량제 봉투 하나에 다 쓸어담는다면 말도 못할 만행이 아닌가. 나는 결국 이 골목도 아련한 순간쯤으로 묘사해야 하는 상황에 우울해진다. 게다가 예상과 달리 사진도 그다지 아련하게 나오지 않았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가도 이동전화와 그에 따른 부산물에 엄청난 열의를 보이는 듯하다. 애초에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자신을 누군가에게 연결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실제로 전 인류가 연결되어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대는 품었다 꺾일 때 더 아픈 법이다.





  안녕, 얘들아?





  시외버스 터미널 주변이었을 것이다. 마닐라의 교통 체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면 중 하나다. 창문이 활짝 열린 지프니에 실려 꽉 막힌 도로를 헤쳐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에서는 피로와 무기력 중간 어디쯤에 있는 감정이 읽혔다.





  뜨거운 태양, 열기, 아스팔트의 역습. 엉키고 가로지르고 뚫고 들어가고 튀어나오고 양보하고 가로채고 웃고 무심하고 찡그리고 손 흔들고 무기력하게 서 있고 마시고 기대고 바라보고 주의를 시키고 주시하고 기다리고,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 이 새하얀 육교가 반환점이 됐다. 친구들과 한 시간 반 정도 후에 보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늦었다간 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닐 테니까.





  트라이시카드(자전거)를 타고 돌아갈까 하다가-





  힘들기도 했지만, 타 보고 싶기도 했기에 택시를 잡았다. 일단 에어컨이 나온다는 데 행복했다. 나중에야 마닐라 택시들이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미터기 요금 그대로 받았고, 내 애매한 위치 설명도 아주 잘 이해해 주었다.





  택시로 돌아오자 꽤 길다고 여겼던 길이 한 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무슨 음악이 나왔으나 기억할 수는 없고, 와이파이 마크가 붙어 있어도 접속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앉아 아이폰의 메모장으로 거리의 인상을 써 보았다. 펜과 종이가 있었으면 더 좋을 것 같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로부스타 향으로도 만족스러운 커피가 얼음을 녹이고 있으니, 그걸로 대충 갈음할 수 있었다.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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