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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의 넷째 날에는 숙소를 옮겨야 했다. 전날 익스피디아에서 저렴한 레지던스로 미리 예약해 둔 우리는 빠르게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친절한 호텔 직원은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는지 다른 곳으로 가는지 묻다가 그저 자는 곳만 옮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택시를 잡아주겠다고 했다. iSanook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자 손수 지도를 출력한 다음 태국어로 메모까지 해서 택시 기사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렇게 진심 가득한 서비스를 받아본 게 얼마 만인지. 기분 좋게 우리의 첫 호텔을 떠날 수 있었다.
iSanook은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레지던스로 세련되고 깔끔한 두 채의 빌라로 이뤄져 있다. 리셉션에 있는 직원들은 태국인뿐 아니라 다른 국적의 직원도 있어서 다양한 고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해먹 같은 의자가 놓인 이국적인 로비에서는 방이 나오길 기다리거나 무료로 제공하는 툭툭이 서비스를 기다리는 사람, 컴퓨터에서 이티켓을 출력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한쪽 벽엔 거대한 텔레비전에서 HD 화질로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아래 놓인 책장에는 각국의 여행자들이 남겨놓고 간 듯한 책이 잔뜩 꽂혀있었다. 장기간 여행하는 사람들은 가져간 책을 다 읽으면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도록 숙소나 카페, 펍 등에 그걸 놔두고 - 또는 버리고 - 온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러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기간 동안 어떤 것을 버리고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그렇다, 집에 가서 다시 읽을 수도 있는 유일한 짐이니까.
체크인 시간은 오후 두 시인데 정오 조금 넘겨서 도착한 탓에 로비에서 방이 나오길 기다렸다. D는 영화를 봤던 것 같고, 나는 노트를 정리했다. 여행을 와서 이렇게 자주, 오랫동안 한 곳에 처박혀 있을 수 있다는 데 놀라면서 동시에 감사했다. 지금까지의 여행은 너무 짧고 빠르기만 했구나.
드디어 방이 나왔다. 주변은 완전히 주택가로 보이는데 여기 빌라만 남국 해안가에 있는 휴양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간 순간, 웃을 수 없었다. 리셉션에서 우리에게 더블 베드를 배정했던 것이다. 맙소사. 그냥 별 의미 없이 방을 배정한 건지 우리를 연인으로 본 건지 파악하려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로비에 전화를 걸어 우리는 더블 베드를 쓰지 않는다(!) 트윈 베드를 달라고 부탁했다. 여성은 약간 웃음기가 밴 말투로 그러면 트윈룸이 있는지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긴장되는 삼사 분이 흘렀다. 사실 D와 나는 여행 중에나 같이 출장을 갔을 때 더블 베드를 사용해 본 적이 있다. 그것도 꽤 많다. 문제는 아무 말 없이 더블 베드를 사용했을 때, 우리가 단순한 동행자에서 좀 더 은밀한 관계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개의치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일부러 호들갑을 떠는 게 그 나름의 재미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무사히 트윈룸을 배정받아 방을 옮겼다.
다른 여행, 예컨대 홍콩이었다면 우리는 바로 달려나갔겠지만, 다시 한 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빨랫감을 모아 수영장 근처에 있는 세탁실로 향했다. 가고 나니 그곳에서 세제 자판기가 없어 숙소 건너편에 있는 구멍가게에 세제를 사러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겨우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여자아이가 스마트폰으로 TV프로그램을 보며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똘망똘망하게 생긴 아이였는데 나를 보고 일말의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세제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영어로 쓰인 물건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향기가 그려진(?) 플라스틱 통을 들고 흔들다 뒤집다 소리도 들어보다 하다가 아이를 향해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영어 할 줄 아니?" "응, 할 줄 알아." "세제가 뭐니?" "세제?" 세제는 실은 나도 몰라서 사전에서 찾아본 단어였다. 아이가 갸우뚱하길래 "빨래하는 거." 했더니 뭔지 알겠다며 카운터 아래 진열장에 있는 컬러풀한 봉지를 가리켰다. "그럼 이건 뭐야?" "몸에 바르는 거." 아이는 팔에 파우더를 뿌려 바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역시 똑똑하다. 세제에 섬유 유연제까지 구입한 나는 또 보자며 가게를 나섰다.
세탁기는 한 시간을 돌려야 하고, 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D는 잠을 자고 나는 책을 읽다가 빨래를 찾으러 갔다. 드라이까지 하는 데 15분이 더 필요해 이번엔 수영장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길 위에서'는 흥미진진했다. 뒤편에서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신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로는 야자수가 흔들리고, 날씨는 적당히 더웠다. 모기도 몇 마리 방문하고 지나갔다. 이것이 휴가이구나. 거의 마른 빨래를 들고 방 안으로 돌아오자 다우니의 향기가 실내에 은은하게 퍼졌다. 예전에 동남아시아의 어느 도시에서 방을 잡고 빨랫감을 늘어놓았으면 좋겠다는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상상, 그대로였다. 아마 그때 가정했던 도시도 방콕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다시 나갈 준비를 마친 우리는 숙소에서 제공하는 무료 툭툭이를 타고 기차 역으로 향했다. 내일 북부 치앙마이로 올라가는 야간 열차 티켓을 사기 위해서다. 밤 10시에 출발, 다음 날 한 시 도착. 무려 15시간의 기차 여행이 시작될 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방콕에서의 마지막 밤(사실 아닐 수도 있었다. 내키면 하루고 이틀이고 더 있을 생각이었으니까.)을 즐기기 위해 카오산 로드로 향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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