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늦잠을 잔 관계로 혹시나 해 볼까 했던 집라인 투어는 물 건너 갔다. 게다가 너무 비싸기도 했다. 대신 치앙콩까지 올라가 라오스 훼이싸이로 넘어간 다음 배를 타고 루앙 프라방으로 가는 여행사 프로그램을 찾아냈다. 무려 2박 3일에 걸친 긴 여정이었지만, 숙박도 하루 포함이고 밥도 주는 데다가 슬로우 보트도 예약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루트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배를 타고 메콩 강을 따라 라오스 루앙 프라방으로 간다! 게다가 한 사람당 1,600~1,850밧 이었으니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느린 배니까 멀미도 하지 않을 것 같았고.
우리는 늦은 점심도 먹고 빨래도 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나갔다. 하루하루를 아주 빠르게 소진하는 느낌과 여유를 만끽하며 휴가를 즐기는 느낌이 번갈아 찾아왔다. 밤은 길고 낮은 짧지만, 어느 정도 상쇄는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치앙마이 역시 밤에도 누군가를 만나 어울리기에 좋은 곳인 건 분명하니까 말이다.
빨래방(정확히 말하면 세탁기 터)에서 빨래를 돌리고 어제보다 훨씬 더운 거리를 걸으며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우선 속이 쓰려서 해장을 해야겠는데 끌리는 음식이 없었다. 일식? 회 뷔페가 있긴 했지만, 가격도 비싸고 오픈 시간이 20분이나 남아있었다. 인도 음식이나 햄버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에어컨이 있는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덥고 갈증 나고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빨래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음식을 하나 주문하면 하나 더 주는 행사를 하는 식당이 하나 있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보아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고, 무엇보다 에어컨이 있었다. 햄버거와 스프링 롤을 파는 곳이었는데 그곳으로 들어갈 땐 메뉴가 무엇인지조차 상관없었던 게 분명했다. 시원한 바람, 편안한 의자가 필요할 뿐이었다.
우선 수박 주스인 땡모반을 한 잔씩 시킨 다음 메뉴를 검토했다. 사실 해장으로 먹을 만한 게 거의 없었다. 팬케이크가 있었지만, 아침 메뉴라 그런지 지금은 재료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계란 프라이가 들어간 '돼지 볶음밥'으로 보이는 메뉴를 두 개 주문했다. 차가운 바람을 맞고 차가운 주스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틀에 한 번씩은 숙취에 시달리는 것 같다. 줄여야 한다. 최소한 글을 쓸 정신과 체력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난 몇 번씩 다짐만 한다.
우리가 시킨 건 '돼지 볶음밥'이 아니라 '감자 튀김이 들어간 돼지 볶음'이었다는 안타까운 결론과 함께 해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나와 D는 잠깐 일정을 분리하기로 했다. D는 마사지를 받기로 하고, 나는 건조 중인 세탁물을 찾은 다음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컨디션이 좀 안 좋긴 했지만, M이 추천한 체인점 와위 커피를 한 번 마셔봐야 할 것 같았다. 알고 보니까 그곳이 와위 커피인지도 모르고 어제 D와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사진까지 찍고 지나간 곳이었다. 건조대에서 막 나온 빨래에서 좋은 향기를 담은 훈풍이 불어나왔다. 기분이 좋아졌다. 매일 빨래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길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 골목길을 걷는다. 원래 치앙마이 구시가지가 그리 번화한 편은 아니지만, 골목길에는 더 육중한 정적이 있었다. 그 골목에는 특히 태국 요리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쿠킹 스쿨이 많았다. 한 무리의 진지한 외국인들이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강사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여기서 요리를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걸 집에 가서도 써먹어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와위 커피에서 시킨 '아이스 와위 커피'는 우리에게 익숙한 음료로 치자면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 정도가 될 것 같다. 로컬 커피라고 하길래 도이창 커피처럼 인접한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수확한 생두를 볶은 원두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냥 아이스 커피보다 훨씬 시원해 더위가 싹 날아갔다. 에어컨도 잘 나왔다. 투명한 비닐봉지에 넣어놓는 바람에 나와 D의 속옷이 다 드러난 빨랫감을 건너편 의자에 올려두고 나는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두 문단쯤 썼을 즈음 젊은 백인 남자 한 명과 동양 여자 한 명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태국 사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홍콩 출신인 여자애였다. 그들은 잠깐 대화를 나누다가 남자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여자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두드리고 있는 블루투스 키보드에 관심을 보였다. 작고 가벼운데다가 심지어 접히기까지 하는 - 그래서 나조차도 신기한 - 키보드를 보더니 남자가 그게 블루투스 같은 거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이번엔 여자애가 물었다. "한국에서 사 가지고 온 거야?" 어라? 내가 한국 사람인 건 어떻게 알았지? 알고 보니 책상 위에 올려 둔 책의 한글을 보고 알아맞힌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일주일 전부터 함께 여행했고, 오늘 여자는 방콕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녀가 날 두고 떠나 완전히 혼자 남아" - 베트남 호치민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남자의 출신 - 미안하다. 묻지도 않았다. 그냥 발음으로 미국인이겠거니 했다. - 은 그렇다 쳐도 같은 아시아인,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홍콩에서 왔다는 것에 몹시 반가웠다. 그런데 이번엔 남자애가 날 놀라게 했다. 내 책의 제목을 유심히 보더니 글자를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을 우이에서?"
맙소사.
"한국말 할 줄 알아?" "아니, 그냥 읽을 줄만(발음만 할 줄) 알아. 읽는 건 쉽거든. 정확히 발음이 어떻게 돼?" "길 위에서." 그러더니 이번엔 작가의 이름을 읽기 시작했다.
"잭 케에루아?" "응, 잭 케루악. '길 위에서'라는 소설이야." "아, 잭 크루악(그들의 멋진 발음으로). 읽어보진 않았어." 책의 정체(?)를 알자 이번엔 여자애도 반응을 보였다. "난 읽어봤어. 재미있는 소설이야." "영화도 봤어? 난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어." "응, 둘 다 봤어. 다른 점도 있긴 하지만, 둘이 거의 비슷해." 역시 일행을 앞에 놔두고 책을 펼칠 때부터 알아봤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그러더니 그녀의 여행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되게 좋아할 소설이야."
"그래? 어떻게 알아?"
"그냥 그럴 거 같아."
아하, 남자가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지 감이 오는 것 같았다. 뭐랄까 망나니와 똘똘이의 조합이랄까. 나는 이 둘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곧 D의 용무가 끝날 시간이었다. 그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어차피 그들도 곧 헤어질 운명이지만.
빨래 봉지를 덜렁덜렁 들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은 한결 가벼웠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즐거운 대화를 했으니 그걸로 족했다. D는 마사지를 받으며 코까지 골면서 푹 잤다고 했다. 고작 한 시간이었으나 각자에게 딱 어울리는 오후를 우리는 보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