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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롱베이엔 삼천 여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각각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배가 그 바로 옆을 지나갈 때는 절로 고개를 들어 꼭대기를 올려다 보게 되었다. 석회암 섬은 꼭 하늘에서 떨어져 바다에 막힌 모양새였다. 그 위에도 나무는 무성하라 머리카락처럼 돌덩이를 덮었고, 그곳에 둥지를 튼 새가 이따금씩 순찰을 돌았다. 수면고 맞닿는 부분은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에 깎여나가 안쪽으로 파여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얇은 줄기만 남아 섬을 지탱하다 결국 쓰러질지도 몰랐다. 아마 내 생애에 그런 광경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세월의 힘엔 놀랄 뿐이다.
바다에 크고 작은 섬이 수없이 자란 풍경은 팔라우에서 보던 것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개체 수가 훨씬 많았다. 게다가 우리가 타고 있는 것 같은 수많은 크루즈가 절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자칫 밋밋할 뻔한 풍경 사진에 우연히 사람이 한 명 들어가 거기에 깊이를 부여하듯 크루즈는 곧 하롱베이의 일부였다. 작은 패들 보트도, 두 사람이 열심히 노를 젓는 카약도 모두. 매끄럽게 회전하는 몸체들. 섬 그늘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길쭉한 갑판들. 그리고 선 베드에 누워 책을 읽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지나가는 배에 손을 흔드는 사람들.
고요하면서 동시에 압도적이었다. 함께 어울릴 젊은 사람들이 없어도 자연이 우리 곁에 있었다. 왜 나이가 들면 '자연을 벗 삼는다'라고 하는지에 대한 핀트가 어긋난 답변을 얻었다고나 할까. 진정한 친구는 줄고, 그들은 때로 먼저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저를 마음 속에 담고 떠난 우리를 내내 기억할지도 모른다...
멀리서는 섬의 해괴한 외형을 즐기다가 가까이 가서는 복잡한 표면과 칼로 두부를 자른 듯한 사선 단층을 유심히 관찰했다. 사파 산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음이 분명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롱베이에 온 것을 후회할 이유도 없었다. 한 번은 봤어야 할 그런 기묘함이 여기엔 있었다. 종종 나와 D는 여행을 오길 정말 잘 했다고 말한 순간이 있었다. 방콕의 카오산 로드에서 그랬고, 치앙마이의 석양 아래 거리에서 그랬다. 방비엥의 오두막 누워 그랬고, 지금 바로 여기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스물여덟 날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걸 감안해 보면, 우리는 행운아가 아닐 수 없다.
크루즈 투어에선 세 가지 투어를 즐길 수 있었다. 파도가 잔잔한 곳에서 카약킹. 세계 7대 자연유산에 들어가는 아주 거대한 동굴. 그리고 좁은 해변가에서 즐기는 노을 아래 해수욕. 바다에서의 카약킹은 방비엥의 남콩 강에서 즐겼던 것보다 훨씬 쉬웠다. 이젠 나 혼자 노를 저어도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갈 수 있었다. 물론 햇살을 피할 곳이 없어서 거의 속력을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가 노를 놔두고 담배를 피우고 있자 발음 상 영국에서 온 것 같은 한 여자가 저 멀리에서 카약킹을 하며 우리더러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최고라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머리에 꽂아둔 자기 선글라스를 쳐버렸고 안경은 그대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도 당황했고, 그녀도 당황했다. 여기서의 교훈은 두 가지다. 담배는 '다른 사람'에게도 해롭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대충 머리에 꽂아두고 바다에 나가지 말자.
두 번째 체험인 승솟 동굴 탐험은 또 놀라운 체험을 안겨주었다. 제주도와 하와이에서도 비슷한 동굴 체험을 했던 것 같은데 이곳은 스케일이 달랐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의 세트장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주위의 모든 것을 만져도 되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건 뭐 이렇게 크니까 조금 만진다고 해도 상처도 안 받겠는 걸. (물론 시간이 지나면 더욱 엄격히 관리할 수도 있겠지만.) 하롱베이가 용이 지나간 자리라면, 이곳은 그 용이 머무는 둥지가 분명했다. 사구 같은 반달 무늬가 있는 천장, 땅에서 솟아오른 석순, 그리고 아주 세심하게 설치한 인간의 조명. 하롱베이에도 여러 동굴이 있는 모양이지만, 이 가장 거대한 동굴엔 꼭 한 번 들어가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린 어느 작은 섬에 생겨난 해변에 내려 잠시 시간을 보냈다. 모래는 파도와 세월이 잘게 부수고 또 부순 덕분에 입자가 잔설탕처럼 고왔다. 손으로 들엉올려 흘리면 그게 그대로 바람의 길로 보였다. 크루즈 두 척이 해변 가까이에 정박해 있었고, 연인들은 백사장에 드러누워 석양을 바라보았다. 하와이에서 온 두 남자는 역시 저들의 출신을 유감없이 발휘해 힘차게 수영을 했다. D도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바람이 쌀쌀해서 제법 추웠지만, 노을의 색이 워낙 붉어서 그 빛만으로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빛에 소리가 있다면 아주 낮은 풀벌레 소리, 나무로 만들어진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를 닮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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