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다음 날, 우리는 배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갈아타기 전, 배는 바다 위 진주 농장에 잠깐 들렀다. 마치 어제의 동굴이나 해변이라도 되는 것처럼 꽤 많은 크루즈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다 같이 글을 양식하는 모습과 진주의 씨앗을 이식하는 과정과 결국 삼 년된 운 없는 녀석에게서 진주를 꺼내는 과정까지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단체 여행에 쇼핑이 포함되어 있듯, 진주 농장 방문도 현지 여행사의 부수입이 되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루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사지 않은 듯했지만.
진주를 얻어내는 과정은 딱히 윤리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앞으로 잘 자랄 것으로 보이는 조개를 골라 거기에 코어를 이식하고, 몇 년이 흐를 때까지 그물에 묶거나 망에 담아 기르는 게 말이다. 멀쩡하고 값비싼 진주를 얻어낼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물론 진주를 추출하고 나면 조개는 죽는다. 그러면 그들을 물고기에게 먹이로 준다고 한다. (껍질은 가공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직원은 "우리는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고, 자연으로 돌려줍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렇네요, 라고 대답해 주기엔 뭔가 뒤가 켕기는 느낌이었다.
진주는 그저 진주였고, 남자들은 물처럼 매장을 흘러나간다. 여자들은 그나마 뒤에 남아 구경을 좀 하는 것 같긴 했다. 우리는 매장 위에 마련된 카페에서 베트남식 커피, '쓰어다'를 주문했다. 진하게 내린 커피에 연유를 타 마시는 이 커피는 한국에서 만들어 마셨을 때보다 별미였다. 그냥 마시기엔 그리 맛이 좋다곤 할 수 없는 커피였으나 연유는 막강하다. 간장이나 올리브 오일이 요리계의 황금 열쇠라면 우유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연유는 커피계의 황금 열쇠랄까. (프림과 설탕이 조화된 커피 믹스를 떠올리면 된다.) 물론 몸에는 그리좋을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커피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커피만 좋으면 된다."가 있다. 그러나 "프림과 설탕 또는 연유만 있으면 된다."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도 분명히 있는 셈이다. 사실 이 배에서 준 커피가 조금 별로였고 대체로 베트남 커피는 맛이 좋았다. (이 문장을 이미 다른 데서 쓴 것 같긴 하지만) 심지어 G7도 한국에서보다 더 맛있었을 정도니까.
즐겁게 연유 커피를 마시고 배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튀김, 야채 볶음, 밥, 그리고 과일. 그리고 스위에서 혼자 온 여성과 우리를 제외하고 일행과 헤어질 시간이 됐다. 셋은 여기서 다른 배로 옮겨 타 깟바 섬으로 가고 다른 이들은 하롱베이로 올라가 하노이로 귀환한다. 사실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세 정이 든 모양이다. 옮겨 갈 배에는 우리가 바라던 젊은이들이 가득 타고 있었으나 벌써 조근조근하고 유머가 있던 이들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 만난 이들보단 기존의 멤버가 훨씬 괜찮기도 했다.
크루즈 두 대가 머리를 맞댔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하고 갑판을 밟고, 다른 배로 옮긴 후 이번엔 만남의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탄 배가 멀어질 때까지 사람들은 즐겁게 손을 흔들어 줬다. 나와 D는 줄곧 둘이서만 다니고 있긴 했으나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는 이들을 보면 끊임없이 이별과 만남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맞아 같이 다니다가 서로의 계획이 다르면 악수나 포옹을 나누고 헤어진다. 걱정하지는 말자. 멀리 외국의 주소로 엽서를 보내 띄엄띄엄 서로의 안부를 물을 필요는 없다. 요즘은 스마트폰과 페이스북이 있으니까. 페이스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행 중 페이스북은 유용했다. 공통된 메신저가 없는 우리에게 페이스북은 서로의 이름과 사진과 담벼락과 메신저를 제공하니까. 외국으로 유학을 가거나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선후배들이 외국인들과 친구를 맺고 함께 사진을 찍은 다음 일일이 이름을 태그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가볍고 빠른 교제에 이보다 좋은 툴은 없다. 또한 머무는 일 없이 시시각각 이동해야 하는 여행 중에는 거기에 어떤 애틋한 그리움까지 깃드는 것 같다. 집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SNS의 불필요성을 논하기에 여행자들은 다른 할 일과 다른 생각거리로 바쁘기만 하다.
새로운 배엔 분명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를 감싸쥐고 갑판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니 어제 밤 늦게까지 맥주를 마시고 게임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하던 현지 가이드도 우리를 따라 배를 옮겨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는 수다스럽고 농담하길 즐겨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어젯밤에 미친듯이 술을 붓고 키스를 하고 난리를 쳤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어제 뭘 했느냐고 묻는다. 있는 그대로 말해주자 그것 참 지루했겠다고 한다. 여기는 파티 보트라고, 파티를 즐기자고 했다. 그러나 파티는 분명 어제 끝났고 다들 괴로워보였다. 뭐랄까 나와 D, 그리고 스위스 여성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커플도 있고 친구끼리 온 멤버도 있고, 어쨌든 그들은 이미 어제 하루에 충분히 친해진 모양이었다. 거기에 우리가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어 보였다. 셋 다 농담까지 섞어할 정도로 영어에 능하진 못한다는 점도 불리했다. 먼저 나서서 친한 척을 하는 성격들도 아니었고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다들 잠이나 자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맥주 후의 숙취라. 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머리를 벽에 세차게 박고 싶은 그 두통과 울렁거림! 배가 조용히 미끄러지는 동안, 오일까지 발라가며 태양을 즐기는 한 여자가 우쿨렐레를 퉁기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러우면서 청승 맞은 면이 있는 악기음과 얇은 목소리의 노래, 그리고 털털거리는 디젤 엔진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하와이가 떠올랐다. 그 섬에서 온 사람을 둘이나 만나서 그럴까. 어제 해변에서 본 석양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보았던 석양과 비슷했기 때문일까. 그 매력적인 섬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허니문으로 하와이에 갈 예정인 D가 몹시 부러워졌다. 그리고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