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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고 온 마지막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 예약자인 내 이름이 쓰인 웰컴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그걸 보자 정말 여행의 끝에 도달했다는 실감이 났다. 사진을 찍은 후 무료로 제공되는 바나나와 초록색 귤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부드럽고 과육이 실한 동남아시아의 과일들. 너희도 일단 안녕이구나.
우리가 잡은 호텔은 서호 주변에 위치했다. 굳이 이 호텔을 잡은 이유는 카지노였다.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재미있게 즐겼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특히 D는 여행 전부터 100달러 정도를 한 번 딱 걸어 운을 시험해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카오에서는 성공했었고, 마닐라에선 실패했었다. 이번엔 어떨까? 100달러를 걸어 100달러를 벌면 바로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그래서 짐을 풀고 역시 무료료 제공되는 웰컴 드링크를 마신 우리는 카지노를 구경하러 갔다. 그런데 규모가 아주 작았고 슬롯머신과 룰렛 뿐이었다. D가 노리던 바카라도 없었다. 그냥 시간을 떼우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한편으로 룰렛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덤벼들 게임이 있어 다행일지도 몰랐다. 우선 어떤 곳인지만 확인하고 호텔을 나와 주변을 한 바퀴 돌며 구경도 하고 KFC에서 햄버거도 먹었다. KFC 건너편에는 으리으리한 소피텔이 있었다. 소피텔은 삼거리를 하나 끼고 있었는데 수시로 경적을 울려대며 바쁘게 움직이는 오토바이 행렬과 이질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도로가 좁고 자동차가 너무 비싸서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한 대씩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저 이륜차들이 모두 자전거였다면 이 도시가 훨씬 마음에 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모레 한국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는 오늘을 포함해 두 번의 밤이 남았지만, D는 오늘을 마지막 밤이라고 치며 한 잔 진하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돈을 벌겠다며 카지노로 향했다. 밥도 먹었겠다 하롱베이에 다녀온 여독도 좀 풀었겠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품이었다. 나는 미국 돈으로 40달러를 뽑아들었고, D는 100달러를 준비해뒀다. D는 오늘 50달러, 내일 50달러만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20달러 씩 두 번, 40달러를 잃었다. 100달러를 건 D는 30달러를 벌었다가 밑으로 떨어져 중간 쯤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담배와 커피가 공짜였기에 내가 잃은 돈으로 그걸 사서 피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반면 D의 게임은 길어졌고, 그걸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건 절대로 돈을 딸 수 없을 거라는 어떤 무력감이었다. 우리 외에 다른 이들을 봐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국적이 무엇이든 가지고 온 돈이 얼마이든 상관없이 다들 게임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특히 사십 대를 좀 넘은 것 같은 마르고 어두운 표정의 한 남자는 끊임없이 50만 동을 달러로 바꾸며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밝아질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런 거다. 괜히 담배를 공짜로 주고 커피나 물을 달라는 대로 주는 게 아니다. 딜러도 없고 그냥 슬롯머신과 기계 룰렛 뿐인 소박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만만하지는 않았다. 나는 마음 편안히 담배 맛과 G7으로 여겨지는 믹스 커피의 달달함을 즐기며 D의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소득이 없어도 오늘이 (감정적으로)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인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중화 지역으로 술을 마시러 갔다. 사실 그곳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로비에 이야기해 택시에 올랐고, 막상 내리고 보니 서울의 주상복합건물 단지 같은 세련된 - 더불어 거의 모두 문을 닫아 어두운 - 거리를 맞닥뜨려 당황스러웠다. 한식당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 이곳저곳 밤 거리를 쏘다녔으나 문을 연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오션 몰이라는 지하 쇼핑몰을 보긴 했으나 역시 문은 닫혀있었다. 우리는 건물 사이로 겨우 보이는 불 켜진 간판을 따라 모든 걸 운에 맡기고 걷기로 했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걷다가 김삿갓이라는 식당을 발견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자 딱 봐도 모든 손님이 한국인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이 주변에 사는 사람들로 말이다. 다른 선택지도 없었지만, 인터넷에서 중화 지역에서도 유명한 식당이라고 본 것 같았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시각이 열한 시 반인가 그랬는데, 젊고 친절한 사장님은 새벽 두 시까지 영업하니 편하게 있다 가시라고 우리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 인테리어도 전부 한글로 되어있고, 훈민정음이 인쇄된 벽지는 한국에 있는 웬만한 전통 주점보다도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정말 제대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는데, 메뉴를 펼치니 그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온갖 얼큰한 안주는 다 있는데다가 삼합에 과메기에 보신탕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개고기를 먹지만 말이다.) 우리는 술국에 모둠 순대, 그리고 소주 한 병이 포함된 세트를 시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병만 나눠 마셔도 취기가 빨리 올랐고, 한국에선 소주를 잘 마시지도 않는데 술맛이 좋았다. 그렇게 총 세 병을 마시면서 이번 여행에 대한 총평을 나눴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는 것. 그렇게 길어 보이던 일정도 결국엔 끝이 보인다는 것. 앞으로 다시 이런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 D는 이번 여행에서 아무것도 얻어가지 않으려 했다는 게 목적이라 했고, 실제로 그 목적을 이뤘다고 했다. 여행이 끝난 후, 그에겐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여유 있던 시절에 대한 짧은 기억과 그리운 정서가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겐 무엇이 남았을까. 몇 편의 글, 몇 장의 사진, 전보다 조금 더 여행에 길든 어떤 상태. 아, 그리고 이번이 끝이 아니라는 막연한 다짐 한두 스푼 정도 남은 것 같다.
술국과 순대는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더 맛있었다(또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역시 한식은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자극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D는 한식이 최고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나는 여행 중 먹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어쨌든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아무것도 얻지 않았다는 데 성공했다는 D의 씁쓸한 말이 부럽기도 했다. 이병률 시인이 여행은 당신의 사소한 취향을 다려 펴주고, 대신 크고 굵직한 취향만 남게 해준다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렇게 내 덧없는 일부를 덜고 아직 발굴하지 못한 새로운 부분을 찾길 원했던 것 같다.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숙제는 결국 풀지 못했다. 김삿갓이라는 익숙한 이름 아래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편안한 느낌과 진솔한 대화가 주는 기쁨, 그리고 개인적인 실패에 따르는 아픔을 동시에 느끼며 비공식적인 우리의 마지막 밤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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