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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술을 꽤 마셨음에도 푹 자서 그런지 숙취가 없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침대에 누워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할 힘을 내려고 애쓰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든 말든 오늘이 마지막 날이든 말든 나는 꾸물거리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가고 싶지 않거나 하지는 않다. 단지 또 떠나고 싶을 뿐이다. 28일이 이렇게 흘렀으니 다음엔 또 다른 28일을, 내키면 280일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술자리에서 D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곧 결혼을 하는 그로서는 다시 이런 긴 여행을 떠나기가 어려울 거라고. 내 코가 석자인데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직전이니 오히려 축하할 일이다. 새로운 삶은 여행, 그 이상일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이 글을 읽을 L양을 위해 굳이 붙인 문장이다. 꾸준히 내 여행기를 읽어준 데에 대한 감사 인사로. 뭐, 제 글이 좋아서라기보단 D가 무엇을 했는지가 더 궁금했을 테지만요. :D)
어쨌든 D는 D고 나는 나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이면 모를까. 그러니 여행기의 후반이라고 감상적이 되진 말자고 다짐했다. 오히려 그런 시기는 여행 중간에 있었고, 지금은 흘러간 일이 되었다. 돌아가서 여행 전체를 돌이켜볼 때, 그때 우린 다시 사그러드는 시간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정오가 넘어 샤워를 하고 나와 D는 호텔을 나섰다. 호치민 묘소가 그리 멀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다. 양쪽에 호수가 있는 길을 따라 카페가 쭉 늘어서 있었다. 누군가는 호수에서 낚시를 했다. 저 호수에 사는 물고기를 먹어도 될까 궁금했다. 카페는 대체로 한가했지만, 인상적인 곳도 몇 있었다. 내가 커피를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 중엔 감각 있는 사람이 많다. 이 음료를 마시다보면 절로 그런 센스가 생겨나곤 한다.
호텔 근처에 있는 하노이에서 가장 큰 호수가 서호다. 서호 주변엔 고급 호텔도 많고, 심지어 하노이에서 처음으로 보는 커피빈 앤 티리프도 있었다. (스타벅스도 없었다.) 한국에서도 만만치 않은 가격의 카페인데 여기선 얼마나 비싸게 느껴질까 상상해 보았다. 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부의 상징을 마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치민 묘소와 박물관, 그리고 왕궁 주변엔 차나 오토바이가 들어올 수 없는 넓은 광장이 있었다. 갓을 쓴 사람들이 열심히 조경을 하고 있었고 하얀 의장복을 입은 군인들이 곳곳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우린 그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호치민 아저씨는 기념품 매대의 엽서나 액자에서 충분히 보도록 하자.
한국 단체 관광객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보며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따로 다니기로 했다. D는 서호를 한 바퀴 돈다고 했고(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너무 크다.) 나는 걸어서 호안끼엠 호수와 구시가지에 가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며칠은 따로 다니자고 했었는데 한 번도 '제대로' 그런 적은 없다. 태국에선 둘 다 길을 몰랐고, 라오스의 도시들은 따로 다닐 만큼 크지 않았다. 하노이가 적격이었다. 현대와 근대의 문물이 공존하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얼마 걷지도 않아 왜 진작 이런 시간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건 우리가 맞는다 맞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다. (재미있게도 여행 중반을 넘어서자 우린 생각까지 완전히 똑같아지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몇 번이고 말하며 웃었다. 이제 이 자리는 L양에게 넘겨드려야겠다.) 여행의 막바지에서 각자 그 긴 시간을 갈무리할 여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고, D는 도심 속 자연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우리가 몇 시간 후 숙소에서 다시 만났을 때, 무슨 생각을 공유할지 궁금하다.
서호 바로 아래 쪽 로터리에서 유럽풍 건물이 늘어서고 양쪽에 커다란 가로수가 자라 길 전체에 그늘이 드리워진 길로 나는 걸었다. Phan Dinh Phung라는 도로 같았다. 이 길에도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려대며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그런지 그 소리가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이파리와 가지가 그 소리들을 흡수해 저 먼 곳으로 또는 땅 깊은 곳으로 보낸 후 나에겐 시원한 바람만 내려주는 것 같았다. 오늘의 하노이 날씨는 아주 좋다. 날은 흐리고 시원하면서 비는 오지 않는다. 초가을 날씨다. 이런 날씨에 나는 한국이 그리워 진다. 그리워서 바로 그런 날이 한국에 찾아오면 다시 그 날씨를 배반하고 떠나고 싶어진다. 아니다. 떠나고 싶다는 말은 그만하자. 이 거리로 나는 이미 떠나와 있는 셈이니까.
이 거리엔 카페도 많았다. 작고 허름한 카페 앞엔 역시 목욕탕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엄청난 커피를 생산하는 국가답게 베트남 사람들은 커피를 참 좋아한다. 게다가 맛도 좋다. 아무리 로부스타가 많이 쓰였다 하더라도 신선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태국이나 라오스도 이것 만큼은 이곳을 따라올 수 없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매료하기에 충분하다.
배도 아프고 목도 마르고 하여 유독 눈에 띄는 Terra Coffee라는 곳에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젊은 남직원 둘은 영어도 잘하고 친절하다. 내가 들어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내가 자리에 앉자 음악도 틀어주었다. 배우 폴 워커를 추모하기 위해 Wiz Khalifa가 랩을 하고 Charlie Puth가 피처링한 See you again이 첫 곡이었다. 노래 한 곡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밀린 노트도 쓰지 않고 당장 오늘 이야기부터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거리가 하노이에서 가장 좋았노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손님은 나를 포함해 셋으로 늘었다. 서양에서 온 할머니 한 분과 이 도시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 남자는 바깥 자리에 앉았다. 문이 열리면 들어오는 실외 공기는 시원하고 촉촉하다.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멀다. 해가 지기 전에, 또는 비가 내리기 전에 이 순간을 갈무리해서 가방에 넣고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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