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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끼엠 호의 북쪽, 구시가지를 향해 가는 길은 아주 북적였다. 현지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가 즐비하고 주차된 오토바이가 인도를 점령하고 앞서 나가려고 애쓰는 달리는 오토바이는 차도를 점령했다. 하노이에서 안전하게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걷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오토바이를 무시해야 한다. 그들이 알아서 나를 비켜가 주니까. 종종 경적을 울리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 역시 무시하면 그만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몰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류는 정장을 입고 타는 이들이다. 오토바이와 정장은 얼마나 부조화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잘 어울리는지. 두 발 전동차를 타고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남자들은 넥타이를 휘날리고 여자들은 다리를 꼭 붙여 치마가 뒤집어지지 않게 애쓴다. 여자든 남자든 앞뒤에 아이가 타고있든 친구 두 명을 더 태웠든 다들 기가 막히게 운전을 잘한다. 그리고 뒤에서 차가 얼마나 경적을 울려대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고개를 까닥하는 법도 없다. 때로 걷고 있는 나조차 무시하고 달린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며 이 좁은 길을 다니고 다행스럽게도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고기를 파는 집 앞에서 벌거벗은 채 혀를 내밀고 누워있는 개를 보고 흠칫하기도 했고, 온갖 장난감을 파는 매장을 흥미롭게 쳐다보기도 한다. 여행자 거리에서 좀 떨어져 있는 이 거리에 호객 행위는 없다. 다들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세상을 관조할 뿐이다. 단출하게 의자를 내어놓고 길거리 음식을 파는 집은 호황이었다. 곧 저녁 시간이다. 다들 가볍게 저녁을 먹거나 간식을 먹으려나 보다. 그러고 보면 하노이에서 뚱뚱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맥주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말라도 배가 뽈록 나온 사람은 봤어도 거구는 보지 못했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 관리를 잘 한다는 면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나도 여행 중 살이 조금 빠지긴 했는데 일 년 정도면 확실하게 다이어트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절로 양이 줄고 몸은 더 많이 움직이니까. 게다가 여행 중엔 먹는 걸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대충 배만 채우면 그만이다. 배가 찢어질 정도로 고플 때까지 걷는 게 더 좋다. 배가 고프면 더 많은, 뭐랄까 그나마 양질의 생각이 떠오르곤 하니까.
사람도 많고 오토바이도 많고 여행자들도 많지만 하노이는 그런 류의 다른 도시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고개를 들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 이 층부터 이 도시는 현저히 고요해 진다. 발코니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했다. 발코니에는 철창이 쳐져 있고 거기에 덩쿨이 기어 오른다. 빛 바랜 화분이 뭔가를 토해내고 있다. 그곳의 시간은 지상과는 다르게 흐르는 게 분명했다. 이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면은 건물에 있었다. 일 층부터 삼사 층까지 통째로 떼오고 싶었으나 사진으로 제대로 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오롯이 마음에 새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아쉽기만 하다. 알랭 드 보통이 권유한 대로 글 그림이라도 그려야했나 보다.
드디어 호안끼엠 호가 보였다. 내친 김에 성요셉 대성당을 찾고 싶었지만 인터넷이 되지 않아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다. 오는 길에 다른 성당을 한 군데 보기도 했다. 호수를 반바퀴 돌아 구시가지로 입성했다. 확실히 방콕이나 치앙마이, 루앙 프라방과 방비엥에 비하면 여행자들이 많지 않은 도시다. 이곳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 여행을 시작하는 이들도 많았는데, 다들 오래 머물진 않고 사파 산이나 하롱베이에 들렀다 남부로 또는 서부로 서둘러 떠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이곳은 사람으로 꽉 찬 모양새다. 여행자 거리라고는 하지만 하노이 시민들이 더 많았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도 외국인이니 얼굴 하나하나가 낯설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종종 혼란이 찾아온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고 마는 것이다. '길 위에서'의 초반에 어느 오후, 낯선 도시에서 눈을 뜬 샐이 심지어 저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린 유령의 삶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는 바로 그런 순간을 꿈 꾸는지도 모른다.
기념품을 살까 하다가 관두고(정말 지금까지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하롱베이에 가기 전에도 한 번 갔었던 맥주 골목에 갔다. 이번엔 초입에 있는 Local이란 바에 갔는데 바깥 자리에는 여기 사람으로 보이는 두 여자와 프랑스에서 온 커플이 있었다. 내가 바깥에 앉겠다고 하자 앉을 의자와 테이블로 쓸 의자(!)를 깔아주었다. 나는 타이거 생맥주를 주문하고 프랑스 커플과 인사를 했다. 내가 재떨이를 달라고 종업원에게 말하자 프랑스 남자가 웃으며 그냥 길에다 털고 버리면 된다고 했다. 거리 전체가 재떨이라니! (전에 갔던 바에선 재떨이를 줬다.) 바깥 자리를 관리하던 종업원이 내 옆에 앉아 휴식을 취했고, 멋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갖고 있던 프랑스 여자가 그를 찍었다. 디지털 폴라로이드였는데 사진을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고, 내키면 인화지에 바로 뽑을 수도 있는 놈이었다. 얼마나 탐이 나는 카메라던지! 그것이야말로 여행에 최적화된 기계가 아닌가. 여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찍다 보면, LCD 창으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인화된 사진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다음 여행에선 진지하게 휴대용 인화기를 가져갈까도 생각했을 정도다. (다 짐이겠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내 카메라에 담긴 사람에게 뭔가를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나는 여자에게 정말 멋진 카메라 엄지를 들어올렸다. 즉석에서 사진을 받은 종업원도 기뻐보였다. 분위기가 아주 부드러워졌다.
커플이 마사지를 받겠다며 자리를 뜬 후, 이번엔 베트남 아저씨 두 명이 그 자리에 앉았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들은 아저씨가 그때부터 맥주를 권하고 햄처럼 고기를 다져 굳힌 안주를 주기 시작하셨다. 내가 시킨 맥주는 두 잔이었는데 잔이 비질 않았다. 오후 9시까지는 한 잔을 주문하면 한 잔이 공짜라 맥주병이 엄청나게 쌓였다. 탱탱한 식감의 안주도 맛있었다. 한 아저씨는 사업가인지 세 번 한국에 간 적이 있는데 소맥이 제일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350cc나 500cc 잔에 맥주를 2/3 정도 채우고 소주 잔을 빠트리는 식으로 드셨나 보다. 아, 소맥은 그렇게 타는 게 아니라구요. 내가 제대로 맛있게 말아드리고 싶었다.
맥주는 배가 불러 더 못 마시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을 시키면 역시 한 잔이 공짜였다. 롬, '숲'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종업원과 꽤 친해져서 그는 아예 두 잔을 가져다 줬다. 그렇게 진토닉을 네 잔 마시자 배도 부르고 얼큰하게 취했다. 왜 이 불편한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알 것 같았다. 상상하던 기분 그대로였다. 바람을 맞고 이야기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고 가끔 행상인이 안주를 권하면 그걸 사 먹기도 하고. D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로 꽤 그럴싸한데 말이다. 서로를 기어이 완주하고 만 D는 몸이 안 좋은 듯했다. 나도 루앙 프라방에 도착해서 감기로 고생하긴 했지. 그러나 이 소중한 시간에 나는 아플 수도 없었다.
일곱 시가 조금 넘어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D는 아직 밥을 먹지 않은 상태라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그냥 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취한 나도 알리오 올리오 한 접시를 주문했다. 양도 많고 기가 막히게 맛 있었다. 정말 마지막 날이다. 도대체 언제 오늘까지 왔을까. 방콕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집에 가는 날이 까마득하기만 했는데. 그러나 아무 걱정도 없고 심란하지도 않다. 비엔티안의 한 카페에서 보았던 경구처럼, 이제 마지막이라 다 괜찮은 걸까? 그런데 왜,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 거지?

D는 마사지를 받고 카지노를 하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M과 통화를 하다가 글을 쓰지 못했다. 술기운이 올라왔다. 자고 싶었고, 곧 잠들었다. 마지막 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창 여행 중인 지난 날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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