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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가에게 정이 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처음 만나는 사람과 얼마 만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하는 문제보다 어려운 질문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있어도 첫눈에 정이 들었다는 말은 없는 걸 보면 정의 숙성기간이 사랑보다 길다는 건 알겠다. 하긴 정이란 말 자체에 그 대상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은가. 하지만 반드시 누적된 시간이 길어야 정이 드는 건 아니다. 출장이나 여행 중에 스친 사람에게, 때로는 인터넷에서 만난 얼굴도 모르는 아이디에게 정이 들 여지도 있다. 수십 년을 같이 산 부부가 눌러 담은 오만가지 정처럼 농밀하진 않겠지만, 그렇게 짧은 교제의 와중에도 마음이 열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하여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정이 드는 문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느냐에 달려 있다.
  빈의 모호한 특징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자고 애를 쓰던 태도는 어쩌면 빈과 사랑에 빠지려는 노력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연애가 급해서/어떻게든 알찬 여행을 보내기 위해서,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장점을 끄집어내려는/방문한 도시에서 매력적인 면을 찾아내려는 발버둥을 친 것이다. 그런데 빈에서 이틀을 보내며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는 대신 정이 들었다. 굳이 정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강렬한 매력을 느끼거나 갑작스런 충격에 빠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것도 나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진 않았지만 도시의 전체는 점점 가까워 졌다. 그것은 불분명한 대상에게 자각할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스며드는 과정이었다.


빈의 둘째날.


  빈 국립 오페라를 시작으로 케른스트너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온통 우윳빛이 감도는 회색으로 덮여 있어 전통적인 건축 양식조차 낡아 보이지 않았다. 4차선 도로가 뚫려도 될 만큼 넓었지만 이곳은 오로지 보행자만의 거리였다. 마치 산책하듯, 자동차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걸을 수 있었다. 걸쭉한 모차르트 초콜릿 원액처럼 자유가 흘렀다.
  공사 중인 성 슈테판 성당을 지나(이젠 겨울엔 전 유럽이 보수 작업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모차르트 하우스도 찾아가 보았다. 성당 주변으로 수대의 마차가 정렬한 광경도 볼 수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도 말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온순하게 차례를 지키고 서서 가끔씩 뭔가를 씹고 배설물을 배출하느라 바쁠 따름이었다.

성 슈테판 성당과 그 주변.


  이어서 반시계 방향으로 링 안쪽을 돌았다. 헤렝가세Herengasse 역을 지나 미노리텐 성당을 거쳐 구왕궁으로 꺾어져 내려갔다. 빈 국립 오페라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 반 남짓. 제법 다리가 무거워질 거리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우린 어느새 노래 한 곡을 가사만 바꾸며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어떤 경험을 하겠노라는 마음가짐도 없었고, 굳이 시야를 열어두려는 노력 역시 하지 않았다. 이 조용한 도시는 우리에게 일체의 고민 걱정 없이 편안하게 머물다 가라 권할 뿐이었다. 여행의 긴장은 사라지고 휴가에 온 것 같은 영혼의 이완만 남았다. 빈의 매력은 머나먼 이국땅에 온 티를 내지 않아도 되는 태도, 그 손쉬움에 있었다.

조용한 도시.


  게다가 이렇게 문화·예술과 가까운 도시가 또 있을까? 빈에는 7곳에 이르는 오페라 하우스와 100곳이 넘는 크고 작은 뮤지엄이 있다고 한다. 이 도시는 음악과 미술, 전시를 사랑한다. 예술에 대한 그들만큼의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도(우리처럼) 눈여겨 볼만한 경향이 아닌가.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만난 한 남자는 우리가 공연을 볼 수 없다고 하자 자기 일 마냥 안타까워했다. 다음에 꼭 다시 와서 오페라를 보고 가라는 그의 권유는 티켓을 팔아 보려는 상술이 아니었다.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오페라에 큰 관심도 없었지만, 왠지 중요한 것을 놓친 게 아닌가 하는 간사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곳.


  이곳저곳에 자리 잡은 박물관도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건축 양식에 충실한 곳도 있었고, 화려한 무도회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사람처럼 보이는 곳도 있었다. 단순하고 세련된 선으로 우뚝 선 빈 유겐트스틸의 후예들이었다. 이렇듯 인류의 영감과 노력의 결정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쉽게 접할 수 있게끔 문을 열어두는 수고는 대체로 환영받을 만하다. 계속 앞으로 내달리라고 채찍질하는 현대 문명 속에서, 우린 가끔씩 무언가를 보며 '색깔이 참 예쁘네'라는 사소한 감탄이라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면서 천천히 걸을 일이 아주 없을지도 모른다.

당장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곳.


  왕궁 앞 시민공원에 이르렀다. 공원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서 어디로든 걸어도 되는 하얀 길 같았다. 그 위로 허리가 아주 길거나, 다리가 아주 긴 강아지들이 뛰어다녔다. 어떤 녀석은 주인이 던지는 공을 물어왔고, 또 다른 녀석은 눈밭에 코를 박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느새 가까워진 두 친구는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며 몸을 부비거리기도 했다. 주인은 멀찌감치 떨어져 가끔씩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지금껏 이 도시가 펼쳐 놓은 장면 중 가장 공감할 만한 광경이었다. 갑자기 나도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이곳을 산책하고 싶어졌다. 녀석은 활기에 넘쳐 이곳저곳을 뛰어다닐 테고, 나는 여유롭게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삶의 이런저런 고민은 여전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산책만큼은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해하면서 말이다. 애완동물과 함께 살기 좋은 도시라는 생각은, 곧 누구와도 함께 살기 좋을 것 같은 도시로 전이되었다. 그랬다. 빈은 살고 싶은 도시였다.


서로 모르는 사이.


  무를 만날 때마다 뒷다리를 드는 강아지의 본능이 나에게도 일부 전해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진 나는 왕궁과 가까운 자연사 박물관(Naturhistorisches Museum Wien)으로 피신했다. 관광객들에겐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미술사 박물관이 좀 더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굳이 대세를 따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연사 박물관 쪽이 이름부터 재미있어 보였다.
  국제 학생증 덕분에 5유로만으로 화장실도 이용하고, 관람도 시작했다. 박물관은 40개가 조금 안 되는 전시실로 구분이 되어있었는데 어떤 곳은 햇볕이 잘 드는 도서관 같은 느낌이었고, 어떤 곳은 마치 놀이공원의 체험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다윈 아저씨와 함게 출발!


  전시 규모는 정말 엄청났다. 지구가 그저 딱딱하고 커다란 돌덩이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수 백 가지의 암석을 시작으로 삼엽충부터 암모나이트, 공룡에 이르는 기나긴 시대의 화석들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 전의 인류가 사용하던 도구와 현대 과학 기술의 대비를 보기도 했다. 한 층 위에는 19개 남짓한 전시실에 수많은 박제/모형 동물이 모여 있었다. 무척추 동물에서 척추 동물까지, 세상의 모든 동물 종은 다 볼 수 있겠다는 예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박제도 얼마나 실감나게 되어있던지 시간을 멈춰 놓은 동물원에 갇힌 것 같았다.

안녕 얘들아?


  단순히 전시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지각 운동, 태풍을 위시한 기상 현상, 운석의 충돌 같은 우주 이벤트까지 여러 자연 현상의 원인과 결과가 코너 별로 설명되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간접적으로 체험도 할 수 있어 재미를 더했다.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화면의 마그마를 밀어 올려 화산 폭발을 일으키는(이 때 발판에 진동이 오는 게 압권이다) 오락거리나, 배(船)의 키를 돌려 시간축을 움직이면 단 하나의 대륙인 판게아가 어떻게 갈라져 지금의 육대주에 이르렀고 미래엔 어떻게 변해갈지 볼 수 있는 가상 시뮬레이션도 있었다. 또 인류 조상들의 두개골을 종별로 모아 놓은 섬뜩한 장면이 있는가 하면 살아있는 벌들이 우글거리는 벌집도 만날 수 있었다. 실로 자연과학과 관련된 것이라면 시시콜콜한 부분부터 커다란 발견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어 보였다.

관람형 자연사 박물관.


  게다가 이곳엔 위트도 넘쳤다. 이 정도면 박물관장이 딱딱한 분위기를 질색하는 사람이라 믿어도 될 정도였다. 서로 쫓고 쫓기는 먹이사슬을 설명하며 톰과 제리의 그림을 끼워 넣고, 인류의 먹을거리를 고대부터 지금까지 비교해 놓기도 했다. 단단한 유리 진열장 안에 마치 몇 백만 년 전 화석처럼 소중하게 들어있는 통조림과 스낵바는 익살 그 자체였다. 또, 왜 갖다 놓았는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돼지 인간이나 뒷골을 찌릿하게 하는 대형 파리 모형도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곳'이라는 박물관의 캐치프레이즈는 거짓이 아니었다. 이렇게 '예술적'으로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었다니!

체험형 자연사 박물관.


  엄청난 크기의 전시실을 모두 돌고 지하로 내려가자 작은 수족관도 있었다. 주로 어류를 비롯한 파충류, 벌레들(아주 커다란, 바퀴벌레의 친척쯤 되어 보이는 벌레 떼도 있었는데 보는 순간 힘이 빠졌다)이 모여 있었지만, 박제된 동물을 보다가 살아 있는 녀석들을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아무리 물속에서 조용히 지내는 생물들이라 해도 박제된 이들보단 훨씬 생명력 넘쳤으니 말이다.



수족관 풍경과 촐싹거리는 도마뱀.

이젠 동영상까지 등장하는 여행기입니다. :D


  박물관을 나설 즈음엔 지구의 탄생부터 생명의 발생, 인류의 등장과 발전을 거쳐 문명사회와 자연의 오지까지 두루 탐험한 기분이었다. 이런 곳이 한국에도 있다면 우리에게,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는지. 도저히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 한 달에 한 번씩은 놀러와 줄 수 있을 텐데, 하면서.

 

핑크색 캡션 사진은 fujifilm F50fd으로
푸른색 캡션 사진은 Canon A-1 + superia 200으로 촬영했습니다.
F50fd 사진은 필름과 느낌을 맞추기 위해 크롭 및 보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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