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애틀에 도착한 첫 날,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하진 않았다.두 시간 넘게 걸어다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리가 빌린 집 주변의 공기를 맡고 보고 듣기엔 충분했다.여기 E Aloha Street 주변은 어느 가이드북이나 블로거의 글에도 나와있지 않지만,시애틀에 가는 사람에 한 번 쯤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었다.부동산 창문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집 주변의 사진들. 동반의 시간. 굴뚝은 집안의 온기를 상징한다. 외벽이 둥근 집은 내부도 둥글까.가구를 놔두기 어려울 수 있으니 그곳엔 그냥 카페트만 깔아두면 좋겠다. 나무가 햇빛을 가려도 좋을 것이다.나무는 빛을 독차지 하지 않으니까. 시애틀엔 정원 관련 숍들이 많았다.자연친화적인 포틀랜드보다 더 많았다.포틀랜드엔 자연자연한 자연..
::: 짐을 부리고 에어비앤비에서 빌린 집에 적응을 하기도 전에 배가 고파졌다.시애틀 여행의 시작은 우선 집 주변 산책으로 하기로 했다.시애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는 캐피톨 힐Capitol Hill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그러니까, 지도 상으로는 가까워 보였다.지도의 레이어를 한 번만이라도 지형 모드로 바꿨다면 좋았을 텐데.캐피톨 힐이란 지역 이름에 괜히 Hill이 붙은 게 아님을 우리는 곧 알게 된다. 동네는 한적했다.주민 모두 일요일의 오수에 빠져있는 것일까.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고 지다다니는 차도 거의 볼 수 없었다.인도 옆에 세워둔 자동차만 각양각생일 뿐이었다.그리고 나무들. 일이백 살은 넘을 것 같은 나무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넓다는 생각은 했지만,이런 식으로 높..
::: 갓 10개월이 된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여행을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다.한국을 떠났다가 돌아오기까지 열흘 남짓.사진에 남은 그때의 시간을 늘어놓기로 한다.이천 장이 사진도 그 시간을 전부 감당할 순 없겠지만,어쨌든 돌이켜 본다는 일은 좋은 일이다.여행의 연장이랄까,여분이랄까,곧 희미해질 기억에 주입하는 질 좋은 영양제랄까. 올해 두 번째로 긴 연휴를 앞두고 인천공항은 사람으로 가득했다.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전에 다 빠져나갔는지 예상보다는 한가했다.패스트 트랙 덕분이기도 하겠지. 새롭게 보는 던킨 도너츠의 외장 덕분에 벌써 미국에 온 느낌이었다.M은 항상 저 옷을 입고 인천공항에 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몬트리올에 갈 때도,..
나는 때로 모든 것이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됐으면 하고 바란다. 단 한 문장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일보다는 쉬울 것이다. 한 장의 사진에 들어가는 정보의 양이 한 문장에 들어가는 정보의 양보다 많으니까. 그러나 이젠 단 한 문장으로 모든 걸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며, 그건 오직 한 장의 사진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엔 어떠한 차별도 없고 어떠한 우위도 없다. 그냥 그러할 뿐이다. 혹시나 뭐든지 짧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사진이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냐고 반문할까 봐 하는 말이다. 그러니 오해를 빚지 않고자 나는 사진보다 글을 좋아한다고 밝히고자 한다. 여기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데, 한 줄의 문장은 모든 걸 표현하지는 못할지언정 모든 걸 밝혀내는 등불, 단서, 족적은 될 수 있다고..
보통은 차를 빌려 가는 곳에 버스를 타고 갔다. 오키나와의 대중교통은 나하 시내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난해한 문제가 된다. 정거장에 붙은 노선도는 암호문처럼 보이고, 만능인 줄 알았던 구글 지도는 침묵하며, 어떤 버스도 시간표에 쓰인 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끝내 오키나와의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한 우리에게 그것이 전혀 아쉽지 않도록 독려한 곳이 바로 미나토가와港川였다. 외국인 거주 지역이었고, 식민지풍의 단층 주택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젊은 주인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 대중교통도 소문만큼 열악하진 않았다. 우리는 그나마 자주 오는 버스를 타서 삼십여 분만에 미나토가와 주변에 내렸고, 다시 십여 분을 걸어 무사히 그 작은 동네에 도착했다. 막상 그곳에 가보니 차가 없는 편이 나아 보였다. ..
시나몬 카페는 오키나와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던 곳이었다. 구글 지도에도 등록되어 있었고 여행 안내서에서도 이곳을 언급했다. 실내 구조가 어떻고 무엇을 팔고 언제 가게 문을 열었다가 닫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되리라는 것만은 확신했다. 호텔과 가깝기도 했을뿐더러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시나몬이란 단어를 덮은 딱딱하고 자극적인 나무 향이 이곳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소한 내 멋대로 상상할 여지는 주었다. 카푸치노를 마셔야 할 거야. 어쩌면 시나몬을 듬뿍 친 이곳만의 커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 결국 두 잔의 아이스 커피만 마셨지만, 오키나와에서 이곳을 가장 좋아하게 되리라는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유명한 곳치고 손님이 적은 건 이상했다. 그래서 우리에겐 잘 된 ..
필름은 유통기한이 십 년이나 지나 있었다. 그걸로 오키나와를 찍자 그곳은 십 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십 년, 이십 년, 또는 삼십 년 전으로. 내가 오키나와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앳된 시절로.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그저 크기만 줄여주면 그만이었다. 더는 손댈 곳이 없었고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 간편함이 좋았다. 간편하다고 가벼운 건 아니었다. 왜 하필 황토색으로 물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하늘은 파랗고 또 파랬는데 말이다. 나와 M은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쨍한 사진도 수백 장이지만, 벌써 그 시간이 아련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필름 사진이 더 사실적이었다. 사람이 기억하는 방식은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
왜 그럴까요. 그냥 올려다보았을 뿐인데요. 서 있는 땅이 다를 뿐 어차피 하늘은 한 배에서 자란 껍질처럼 우리를 덮고 있을 뿐인데요. 푸른 계통의 상석上席, 한두 방울의 농도가 더해졌을 따름인데 무심코 손을 뻗고 맙니다. 때로는 절묘하게 이웃색과 혼합해 버린 영롱한 붓질을 따라 걷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우연히 겹쳤을 뿐인데요. 세월이 가면 언제나 그랬듯 가장 먼저 색이 바랠 열정일 뿐인데요. 참으로 정수만 골라 피운 붉은색입니다. 실은 빨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눌러보라는 듯 봉곳이 도드라져 파랑을 더욱 파랗게 회색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풍경에 밑줄을 긋고, 일상에 굵은 테두리를 둘러 강조합니다. 턱없이 작아도 제 할 말은 다 해버립니다. 눈이 오지 않는 삿포로의 ..
영종대교를 따라 달리다가 매도를 지날 때였다. 땅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무릇했다. 얕은 잔디가 가을이 온다고 저도 단풍이 든 것 같았다. 쓰다듬으면 손에 물이 들 듯한 붉은 빛을 보며 절로 앞으로 갈 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곳에서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세상 어느 곳보다 찬란한 단풍을 보려는 데 있을 테니까. 사소하지만 당위성 있는 연상 작용에 번쩍 현실감이 들었다. 저런 붉은 잔디가 무럭무럭 자라 길을 가르고 하늘을 채우고 눈앞을 어지럽히리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도 덩달아 붉어지는 것 같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장거리 비행은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두 시간 삼십오 분. 마치 그 긴 시간을 보답해 주고 싶다는 듯 개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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