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인플레를 싫어한다고 하고 연인들도 그럴지 모르지만, 적절하게 기능하는 연애 경제를 위해서는 인플레가 유용한 때도 있을 것이다. "아니, 저기요. 미안하지만 두통이 나서/남자 친구가 있어서/여자 친구가 있어서/속이 불편해서 오늘 밤은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라고 말하는 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상대는 진정한 사랑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고 아쉬워할 것이다. 한쪽에서 '내가 부족해. 저이는 과분한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상황은 유리할 것이다. 그제야 유혹하는 쪽에서 초콜릿을 사고, 깊이 한숨지으며 '세상이 허락된다면,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대여, 이 아늑함은 죄가 아닐지니……' 하는 시를 쓰는 것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연인은 단순히 X가 멋지다고 여기지 않고, '..
일반적으로 공동의 고립감은 혼자서 외로운 사람이 느끼는 압박감을 덜어주는 유익한 효과가 있다.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 역의 카페 같은 외로운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고립의 느낌을 희석할 수 있고,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독특한 느낌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이국적이라는 말을 좀 더 일시적이고 사소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만나는 장소의 매력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고향에는 말이 있을 만한 곳에 낙타가 있다거나, 고향에는 기둥을 세운 아파트 건물이 있을 만한 곳에 장식이 없는 아파트 건물이 있다거나. 그러나 좀 더 심오한 기쁨도 있을 수 있다. 우린느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 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1) - 빈(비엔나) 둘, 벨베데레 궁전] 보기 여전히 비구름이 남아있는 하늘 때문에 황혼은 흐리터분했다. 사람들의 추천대로 우리는 링을 순환하는 1번 트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노면전차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실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빈의 시내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물수록 하늘은 붉어졌고, 거리는 가로등 불빛에 젖어 호박색으로 물들었다. 다양한 빛깔로 깜빡이는 네온사인도 노란 색감에 잘 조화되는 인상이었다. 빈의 건물들은 그런 조명 사이에 우뚝 서서 세련미를 뽐냈지만, 동시에 커다란 모형이나 영화의 세트장 같은 느낌도 풍겼다. 트램에서 본 노부부. 부인의 표정에서 동반자에 대한 한없는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반 바퀴를 돌고 Schweden pl..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0) - 빈(비엔나), 하나] 보기 빈에서의 첫날, 의외의 일들로 반나절을 보낸 우리는 즉석에서 나머지 반나절을 위한 계획을 세워보았다. 벨베데레 궁전 방문, 호텔에서 휴식, 저녁을 먹고 시끄러운 술집에서 맥주 한 잔. 굵직굵직하게 자른 고깃덩어리처럼 넉넉한 일정표였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한다는 세목조차 없었다. 어딘가에 적어두거나 외워둘 필요도 없이 간단하고, 본능대로 움직이면 그만이니 실행에 옮기는 것도 쉬웠다. 마음에 쏙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행선지인 벨베데레 궁전은 내가 가자고 고집한 곳이었다. 첫째 이유는 물론 클림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파리에서 좋아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놓쳤던 기억이 떠오르며, 이번만큼은 그런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9) - 부라노 섬, 그리고 베네치아 셋] 보기 낭만적인 파리나 외로운 베네치아처럼 어떤 장소에 어울리는 꼭지를 제 나름대로 붙여 보는 건 여행자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선 그 권리를 행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고 했을 때, 딱히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큰 감동을 받는 바람에 말문이 막히는 경우와는 달랐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중간 어디쯤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 가까웠다. 발음조차 애매한 분위기를 띠는 '모호하다'란 형용사나, 어쩐지 책임을 저버리는 느낌이 드는 '알 수 없는'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상태 말이다. 물론 빈을 수식하기에 좋다고 널리 알려진 단어들은 많다. 일반적으로 '음악'이 애용..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8) - 베네치아, 둘 그리고 무라노 섬] 보기 Faro 선착장에서 LN선을 타고 부라노 섬으로 향했다. 부표와 아스라이 보이는 섬 마을의 기척을 느끼며 배 안에서 한숨을 돌렸다. 모터보트의 항해는 30분 남짓 이어졌다. 그 동안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몸이 지쳐 감각과 마음을 좀먹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색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머물고 싶을 만한 곳, 알고 있는 색 이름이 몇 가지 안 되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똑같이 황홀해 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니까. 부라노로 가는 길. 몇 년 전, 처음으로 부라노 섬을 찍은 사진을 보고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며 감탄을 한 적이 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 매혹..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7) - 베네치아, 하나] 보기 여행을 돌이키다보면 작은 순간도 크게 느껴지곤 한다. 특히 좋은 기억은 남고 나쁜 기억은 잊히는 경우가 많다.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제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지만,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항공기 좌석표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만든다. 똑같은 공식을 적용하여 베네치아에서의 둘째 날을 열자면, 그날의 나는 베네치아에서 눈을 떴지만 전날의 베네치아에 있지 않았다. 파리의 호텔에선 제공받지 못했던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의 등장은 하루의 시작을 경쾌하게 열어줬다. 밀가루 위주의 탄수화물 식단에 단..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6) - 파리, 넷] 보기 기체는 작았다. 아담한 기내 분위기와 종종 작은 동체가 요동칠 때 느낄 수 있는 스릴은 마음에 들었으나 이런저런 불편한 점도 많았다. 우리는 맨 뒷자리(35E, 35F)였는데 하나 뿐인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몰려 든 사람들이 28번 좌석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만약 이륙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저 앞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새삼스러운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콜라를 먹으려면 1유로인가 2유로를 더 내야하는 룰이야 사소한 불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나빴던 건 기내식이었다. 비행기가 제 고도에 오르자마자 배가 고파진 나는, 기대도 안한 푸드 카트가 등장했을 때 내심 감사해 했었다. 게다가 뚜껑을 열자 나타난 짙은 녹색의 음식은 이..
러스킨(존 러스킨, 영국의 미술 평론가·사상가)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낭만적 운명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랑에 대한 요구가 선행하고 그 다음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짝의 선택은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다른 테두리, 다른 비행기, 다른 역사적 시기나 사건이 주어진다면,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클로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클로이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실수는 사랑을 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필연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나는 그녀 말이 거짓말임을 알았다. 그녀는 낭만적인 것을 비웃는 데에, 감상적인 것을 배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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