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든 표지판을 눈여겨 봐. 그 나라 말로 뭔가를 설명하거나 경고하려는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어. 아니면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구나 교사의 얼굴을 하고 있거나. 표지판을 보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돼. 드 보통이 말했지, "어떤 자리에 고향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것을 대신해서 자신의 성향에 더 들어맞는 낯선 대상이 있을 때 이국적인 정서를 느낀다"고. 나한텐 그것이 표지판, 푯말, 대충 그려 놓은 낙서 따위인 셈이야. 이등변 삼각형, 길쭉한 마름모, 옆으로 퍼진 직사각형과 완벽한 곡선의 원. 꼴도 색도 제각각인 바탕 위에 다른 언어가 쓰여있는 게 좋아. 아무리 많은 외국인 사이에 있어도 푯말을 한 번 올려다보는 것만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믿을지..
하와이로 떠나기 전부터 좀 아팠다. 건조한 공기 속에서 여덟 시간의 비행을 마칠 무렵엔 몸살감기도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나와 함께 착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와이의 후텁지근한 바람은 기대와 달리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어컨 바람만 곳곳에 매복하여 한 발 한 발 치명적인 총알을 쏴댈 뿐이었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이렇게 앓는다. 상하이로 가족 여행을 다녀올 땐 마지막 날 식중독 비슷한 증세가 나타났고, 팔라우에선 배를 타다가 비를 쫄딱 맞고 만사 의욕을 다 잃었다. 그러고 보면 융프라우요흐에 올라 어르신들도 끄덕없는 고산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몸이 아프면 서럽기도 하지만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피부나 감각이 딱딱한 치즈처럼 둔감해져서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절묘한 예술 작품을 눈..
초승달 같은 해변에 앞다투어 모인 특급 호텔들이 가장 좋은 경치를 독점한다. 해변으로 나가려면 호텔과 호텔 사이에 난 골목길을 걸어야 했다. 에어컨디셔너의 실외기가 윙윙거리고 반쯤 열린 창문에선 저녁 준비하는 냄새가 풍긴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주방장과 벨보이들은 로비나 식당보다 이곳에서 더 마음 편해 보였다. 골목 끝은 눈부시게 빛났다. 백사장을 밟는 순간, 빛과 소리의 파도가 등 뒤 골목 안으로 쓸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석양, 바다, 모래, 몸매를 솔직히 드러낸 단벌 팬츠와 비키니. 지도를 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와이키키 해변에 모여있었다. 강렬한 빛의 이미지는 시간과 생각의 흐름을 걸쭉한 소스처럼 느려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지평선 부근에 드리워진 구름의 그림자가 천천히..
오하나 웨스트 호텔 앞에 커다란 식료품 마트가 하나 있다. 이름도 푸드 팬트리(식품 저장실). 너무 솔직하게 자아를 드러내는 이름이다.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고 마트 뒤편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한 남자가 지게차에 오른다. 주차장 곳곳에 쌓인 커다란 박스가 그의 일거리다. 시동을 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스스럼없이 웃어 보였다. "일본 사람이에요?" "아뇨, 한국 사람인데요." "그래요? 여긴 한국 사람도 참 많아요." 그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았다. 기다란 손잡이를 움직이자 곤충의 집게 같은 쇳덩이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가 재미있는 거 하나 보여 드릴게요." 능숙하게 박스 밑으로 받침을 집어넣은 남자는 푸드 팬트리 건물 가까이 차를 댔다. 그런데 일 층엔 벽뿐이었다. 재고를 집어넣을 ..
이곳은 하와이의 섬 중 제일 크다는 이유로 빅 아일랜드라고 불려. 사실 이 섬의 진짜 이름이 하와이지만 많은 사람이 와이키키 해변이 있는 오하우 섬을 하와이라고 생각하지. 섬이야 저를 뭐라 불러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본명을 잃었다고 슬퍼지는 건 감정이입을 잘하는 인간만의 속성이겠지. 빅 아일랜드엔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활화산이 있어. 이곳의 산은 해발이 높지만 능선은 젖무덤처럼 완곡하고 부드러워. 구름이 드리워지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의 동산처럼 보일 정도야. 6인승 승합차를 타고 화산 국립공원에 올랐어. 고도가 높아질수록 활엽수가 고개를 숙이고 침엽수가 늘어나. 어쩐지 풍경도 삭막해져, 다시 살아나기 어려운 중환자처럼. 그러다가 드디어 사시사철 수증기가 올라오는 분화구를 볼 수 있는 거야.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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