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홍콩 여행기를 마쳤다. 올해 이월에 다녀왔던 여행을 이제야 정리하다니 심란스러운 속도가 아닐 수 없다. 떠나기 한 달 전부터 이번 여행기를 어떻게 쓸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첫 번째 홍콩 여행기를 쓰고 있을 때였고, 두 번째 여행 전에 그걸 마친다고 안간힘을 쓰던 때이기도 했다. 계획은 대사가 참 많은, 심지어 있던 일을 과장까지 하는, 어떻게 보면 소설 같은 여행기를 쓰려던 거였다. D와 Y를 주인공으로 삼고, 나는 두 사람과 우리 셋에게 벌어진 일을 관조하며 이야기를 진행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돌려 말해 무엇할까. 결론적으로 계획과 전혀 다른 글이 나오고 말았다. 마치 우리의 여행이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처럼. 보름마다 한 편은 썼던 첫 번째 여행기와 달리 이번 글은 참 오래..
::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에 관하여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한국은 폭설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가을 날씨인데 말이다. 며칠 떠나있지도 않았건만 미친 듯이 춥고 마구 눈이 내리던 서울 풍경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게 72시간 전까지 현실이었고, 8시간 후부터 다시 현실이 될 그림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꿈을 꾸자. 몇 달 전에 떠나보낸 가을과 일단 재회하고 보자. 마지막 날이랍시고 그나마 일찍 일어나지 않았나. 지금은 아침과 제일 흡사한 시간이 아니던가. 가방 정리를 하면서 나흘간 너저분해진 기억도 쓸어 모은다. 이번엔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좋지 않았을까. 무엇이 만족스러웠고 무엇이 아쉬웠을까. 여행 계획서를 허투루 썼으니까 여행 평가서라도 제대로 작성해 봐야겠다. 하지 ..
:: 세나도 광장으로 이번엔 제대로 중심부로 온 모양이다. 카지노를 나와 선착장으로 돌아온 후, 다시 마카오 윈 호텔 행 셔틀 버스를 타고 호텔촌에 도착했다. 주변엔 어느 하나 크고 화려하지 않은 건물이 없었다. 윈 호텔만 해도 건물 전체가 황금색 유리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당엔 넓은 분수대와 한쪽으로 기운 부채꼴 모양의 구조물이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크고 화려하지만, 동시에 모든 게 낡았다. 어디에서도 음악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거리는 음소거 버튼이 눌린 듯 조용했다. 눈 부신 네온사인도 침묵 속에서 깜빡였다. 모든 게 시시각각 움직였지만, 모든 게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각과 청각의 불균형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셋 모두 적응이 잘 안 되는 상태에서 마침 화..
:: 마카오로 가는 길 전날 너츠포드 테라스에서 격하게(?) 논 탓인지 오늘도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창문 없는 방은 아침이 왔다는 소식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어영부영 한낮이었다. 마카오를 갔다 오는 날인데 제대로 늑장을 부린 격이었다. 가장 먼저 일어나 분주하게 우릴 깨운 Y는 씻는 것도 일등이었다. 나와 D가 기상 후 갑작스레 덮쳐오는 체력의 한계에 정신을 못 차린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저 셋 다 처음 가보는 곳, 마카오로 간다는 기대 하나로 버텼다. 이번 여행에서 마카오 일정을 맡은 Y는 선별된 가이드로서 우리에게 커피도 내려주고 방도 정리하고 가방을 싸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이 녀석, 오늘 뭔가를 보여주긴 제대로 보여주려나 보구나. 나와 D는 기대를 안고 그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일으..
:: D의 사진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바깥은 완벽히 어두워져 있었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장어가 들어가 배는 든든하고, 이미 밤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시간에 대한 미련으로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여행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휴지기 - 붕 뜬 기분에 사로잡혀 생각도 행동도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 - 가 찾아올 때가 있다. 여행이 언제나 신선하고 흥미로운 건 아니다. 나와 D는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몸으로 침사추이의 골목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뭘 할까? 어딜 갈까? Y를 다시 만나기까지 적어도 한 시간은 남았다. 외국의 도시에서 오랫동안 못 본 친구와 조우하고 있는 Y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친구의 여자친구와 친구 여자친구의 친구들에 둘러싸여서(모..
:: 빅버스 오, 빅버스여. 우리를 스탠리까지 태우고 달렸던 크고 날렵하며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리의 붉은 탕아여. 태양은 온화하고 바람은 열기에 차있지 아니하니 너의 활짝 열린 머리 위에 앉는 게 이보다 더 안락할 수 있을까. 오늘은 새로운 길로,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길로 우리를 인도할 테요, 과감히 딱딱한 객석에 몸을 파묻고 카메라를 높이 들어 원숭이처럼 환호하리라. 그러니까 오늘의 빅버스 코스는 홍콩섬 일주였고, 나와 D도 가본 적 없는 완차이와 코즈웨이 베이를 지나 마지막으로 빅토리아 피크 아래쪽을 보게 될 터였다.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내리자고 얘기했지만, 사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버스틀 타고 달리다 보면 관성에 의해 계속 가게 된다. 하나의 코스를 삼..
:: 란콰이퐁 샤워를 마치자 살 맛이 났다. 욕실은 하나, 다 큰 남자가 셋. 혼전이 펼쳐질 양상이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한 명이 씻으면 다른 두 명은 술 내지는 커피를 마시거나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거나 그도 아니면 모바일 게임을 한다.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맞춰놓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호텔방이 곧 낙원이다. 그뿐이랴. 편의점에서 탄산음료 컵에 가득 채워 얼음을 공수하고, 토닉 워터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음료도 준비해 진을 즐겼다. 실수로 이 리터나 사온 바로 그 술이다. 술잔을 들고 야외 로비로 나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컵 표면에 이슬이 맺히다가 짤랑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얼음보다 더 시원한 소리다. 파도 소리 대신 자동차 엔진 소리가 공명하는 도시 한복판이라 해도 휴양지가 부럽지 않다..
:: 예찬 홍콩의 구정인 춘절春節을 맞아 랑함 플레이스의 푸드코트엔 분홍색 꽃과 조명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뱀이 장식되어 있었다. 홍콩은 포린 수도원이나 웡타이신 사원 같은 곳이 아니면 동양적인 특색을 느끼기 힘든 곳이다.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도시를 개발하고자 하는 방향이 서양에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화는 유럽을, 경제는 북미를. 하긴 우리가 사는 도시 역시 홍콩 못지않은 해바라기 기질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 유교 문화를 기반으로 하며 동북아시아라는 지리적 근접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문화권에선 찾아볼 수 없는 친근함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간 미국인은 왜 뱀이 2013년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눈..
:: 재회 공항과 도심을 잇는 전 세계 공항 철도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 그리고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비싸다는 것. 그들의 도시를 찾은 이가 쉽고 빠르게 시내로 들어와 호텔에 체크인하거나 회의에 참석하거나 관광을 시작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가 최신 기술과 미래의 디자인을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공항 철도다. 그런 점에서 홍콩의 에이이엘은 공항 철도의 대표주자라 할 만하다. 빠르기는 한국의 공항 철도도 만만치 않지만 감사할 정도로 저렴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실격. 반면 에이이엘은 공항 버스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싼 가격으로 제 권위를 유지한다. 두 번 타 봐서 익숙하다는 이유로 이번에도 철도를 이용했다. 캐리어를 안전하게 넣어둘 수 있는 보관대도, 흠 하나 없는 세라믹 코팅 벽면도..
:: 전야제 종로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전집에 오늘따라 사람이 없다. 언제나 일 층은 물론 지하까지 만석이었는데 원하는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 Y는 가운데쯤에 자리를 잡고 D를 기다렸다. 평소 야근은 내 앞에 앉은 Y의 몫이지만, 여행 전날엔 불운의 여신이 항상 D의 편이 된다.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D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D는 홍콩 여행은 비행기를 타는 순간이 아니라 떠나기 전날 오후, 여기 서울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 정의하곤 했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나와 Y의 상황에 입력한다면, 우린 지금 여행의 동반자가 짧은 휴가를 가는 와중에도 일거리를 잔뜩 챙겨 나온 꼴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작년 9월에 홍콩으로 뜨기 전에도 셋이 술을 마셨다. 그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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