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로 모든 것이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됐으면 하고 바란다. 단 한 문장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일보다는 쉬울 것이다. 한 장의 사진에 들어가는 정보의 양이 한 문장에 들어가는 정보의 양보다 많으니까. 그러나 이젠 단 한 문장으로 모든 걸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며, 그건 오직 한 장의 사진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엔 어떠한 차별도 없고 어떠한 우위도 없다. 그냥 그러할 뿐이다. 혹시나 뭐든지 짧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사진이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냐고 반문할까 봐 하는 말이다. 그러니 오해를 빚지 않고자 나는 사진보다 글을 좋아한다고 밝히고자 한다. 여기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데, 한 줄의 문장은 모든 걸 표현하지는 못할지언정 모든 걸 밝혀내는 등불, 단서, 족적은 될 수 있다고..
보통은 차를 빌려 가는 곳에 버스를 타고 갔다. 오키나와의 대중교통은 나하 시내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난해한 문제가 된다. 정거장에 붙은 노선도는 암호문처럼 보이고, 만능인 줄 알았던 구글 지도는 침묵하며, 어떤 버스도 시간표에 쓰인 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끝내 오키나와의 바다를 제대로 보지 못한 우리에게 그것이 전혀 아쉽지 않도록 독려한 곳이 바로 미나토가와港川였다. 외국인 거주 지역이었고, 식민지풍의 단층 주택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젊은 주인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곳. 대중교통도 소문만큼 열악하진 않았다. 우리는 그나마 자주 오는 버스를 타서 삼십여 분만에 미나토가와 주변에 내렸고, 다시 십여 분을 걸어 무사히 그 작은 동네에 도착했다. 막상 그곳에 가보니 차가 없는 편이 나아 보였다. ..
시나몬 카페는 오키나와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던 곳이었다. 구글 지도에도 등록되어 있었고 여행 안내서에서도 이곳을 언급했다. 실내 구조가 어떻고 무엇을 팔고 언제 가게 문을 열었다가 닫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가 그곳에 가게 되리라는 것만은 확신했다. 호텔과 가깝기도 했을뿐더러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시나몬이란 단어를 덮은 딱딱하고 자극적인 나무 향이 이곳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소한 내 멋대로 상상할 여지는 주었다. 카푸치노를 마셔야 할 거야. 어쩌면 시나몬을 듬뿍 친 이곳만의 커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 결국 두 잔의 아이스 커피만 마셨지만, 오키나와에서 이곳을 가장 좋아하게 되리라는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유명한 곳치고 손님이 적은 건 이상했다. 그래서 우리에겐 잘 된 ..
필름은 유통기한이 십 년이나 지나 있었다. 그걸로 오키나와를 찍자 그곳은 십 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십 년, 이십 년, 또는 삼십 년 전으로. 내가 오키나와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앳된 시절로.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그저 크기만 줄여주면 그만이었다. 더는 손댈 곳이 없었고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 간편함이 좋았다. 간편하다고 가벼운 건 아니었다. 왜 하필 황토색으로 물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하늘은 파랗고 또 파랬는데 말이다. 나와 M은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쨍한 사진도 수백 장이지만, 벌써 그 시간이 아련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필름 사진이 더 사실적이었다. 사람이 기억하는 방식은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
왜 그럴까요. 그냥 올려다보았을 뿐인데요. 서 있는 땅이 다를 뿐 어차피 하늘은 한 배에서 자란 껍질처럼 우리를 덮고 있을 뿐인데요. 푸른 계통의 상석上席, 한두 방울의 농도가 더해졌을 따름인데 무심코 손을 뻗고 맙니다. 때로는 절묘하게 이웃색과 혼합해 버린 영롱한 붓질을 따라 걷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우연히 겹쳤을 뿐인데요. 세월이 가면 언제나 그랬듯 가장 먼저 색이 바랠 열정일 뿐인데요. 참으로 정수만 골라 피운 붉은색입니다. 실은 빨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눌러보라는 듯 봉곳이 도드라져 파랑을 더욱 파랗게 회색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풍경에 밑줄을 긋고, 일상에 굵은 테두리를 둘러 강조합니다. 턱없이 작아도 제 할 말은 다 해버립니다. 눈이 오지 않는 삿포로의 ..
영종대교를 따라 달리다가 매도를 지날 때였다. 땅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무릇했다. 얕은 잔디가 가을이 온다고 저도 단풍이 든 것 같았다. 쓰다듬으면 손에 물이 들 듯한 붉은 빛을 보며 절로 앞으로 갈 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곳에서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세상 어느 곳보다 찬란한 단풍을 보려는 데 있을 테니까. 사소하지만 당위성 있는 연상 작용에 번쩍 현실감이 들었다. 저런 붉은 잔디가 무럭무럭 자라 길을 가르고 하늘을 채우고 눈앞을 어지럽히리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도 덩달아 붉어지는 것 같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장거리 비행은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두 시간 삼십오 분. 마치 그 긴 시간을 보답해 주고 싶다는 듯 개인용..
여행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생각보다 한국에, 서울에, 일상에 적응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28일이 객관적으로 길다곤 할 수 없겠으나 이렇게 쉽고 빠르게 꿈이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만에 D를 다시 만나 술을 마시며 "우리 갔다왔던 거 맞지?"라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의미가 떠나기 전보다 더 희미해졌다. 여행의 기억이 그러했듯 현실도 수면 아래 세상처럼 흐릿해졌다.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온 건 음식이었다. 여행 중에는 달고 느끼한 그곳의 음식이 맞지 않았는데, 이젠 맵고 짠 한국의 음식이 맞지 않는다. 원래 짜게..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진 않았다. 새벽은 말근 쌀뜰물처럼 뽀얗게 빛났고 단 한 번 뿐인 여명을 저버리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 후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키보드를 펼쳤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D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어쩌면 이땐 거의 체념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노트를 많이 정리하진 못했다. 좀 더 아침이 묽어졌다. 샤워를 하고 짐을 싼 다음 일어날 시간이라며 D를 깨웠다. 서호에서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체크인 카운터는 열리지 않았지만 한국말을 쓰는 동향의 얼굴이 자주 보였다. 배가 고팠다. 남은 돈이 15만 5천 동이었는데 쌀국수 두 그릇에 생수 한 병을 사자 딱 맞아떨어졌다. 1천 동 하나까지 털어냈다. 직원은..
28일 간의 기록. 28일 동안 기차와 배에서 잔 날을 포함해 모두 열다섯 군데의 숙소에서 묵었다. 가장 많이 숙소를 옮긴 곳은 라오스의 방비엥이었다. 우리는 끝없이 이동했다. 택시, 툭툭이, 송태우, 시내버스, 미니밴, VIP 버스, 열차, 자전거, 오토바이, 슬로우 보트, 스피드 보트, 크루즈, 카약, 비행기 등을 탔으며, 무엇보다 두 다리가 최고의 이동수단이었다. 현금으로 가져 간 1,280달러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ATM기는 두 번 이용했는데 한 번은 재미삼아 해봤고 한 번은 당장 쓸 돈이 없어서 해봤다. 현지에서 카드로 계산한 비용 중 가장 비쌌던 건 2박 3일 하롱베이 크루즈 투어였다. 그리고 단시간에 최고 비용을 쓴 건은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가는 베트남 항공이었다. 우리는 한 시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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