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진 않았다. 새벽은 말근 쌀뜰물처럼 뽀얗게 빛났고 단 한 번 뿐인 여명을 저버리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 후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키보드를 펼쳤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D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어쩌면 이땐 거의 체념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노트를 많이 정리하진 못했다. 좀 더 아침이 묽어졌다. 샤워를 하고 짐을 싼 다음 일어날 시간이라며 D를 깨웠다. 서호에서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체크인 카운터는 열리지 않았지만 한국말을 쓰는 동향의 얼굴이 자주 보였다. 배가 고팠다. 남은 돈이 15만 5천 동이었는데 쌀국수 두 그릇에 생수 한 병을 사자 딱 맞아떨어졌다. 1천 동 하나까지 털어냈다. 직원은..
비엔티안 왓따이 공항은 예상했던 대로 규모가 작았다. 많은 한국 분들이 하노이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을 전송하는 라오인 가족도 있었다. 그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포옹으로 이모 쯤 되는 여자를 보냈다. 그녀는 아마 하노이에 사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면세점에서 미니어처 위스키와 담배 한 보루를 샀다. 갑자기 문명 세계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은 건 비행기에 올라서다. 우리는 그나마 저렴한 베트남 항공을 선택했는데, 듣던 대로 출고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좋은 기종이었다. 베트남 전통 의상을 개량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돌아다니고, 짐칸 아래는 모니터도 달려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에게 비상구 자리를 배정해 준 카운터 직원에게 감사했다. 비지니스 ..
패스트푸드의 자극적이고 획일적인 맛을 누가 싫어하겠느냐만, 나 역시 패스트푸드를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일부러 먹지 않으려고 한다. 중독은 순식간이고, 뒷감당은 평생이니까. 하지만 여행을 가면 이상하게 패스트푸드는 꼭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돈도 아낄 수 있고, 실패할 확률도 적으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한국에도 있는 글로벌 체인이라면 나라마다 차이가 나는 아주 사소한 지점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그런데 B가 소개한 패스트푸드는 필리핀에서는 유명하나 한국에는 없는 브랜드들이다. 특히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는 차우킹은 구전으로 안 것도 아니고 매장을 눈으로 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와 D는 원래 중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게 한국 한정, 그것도 고량주를 5천원에 파는 배달 전..
이미 전편에서 Y와 K를 맞이하기 위해 터미널 4에서 터미널 3으로 이동한 우리지만, 시간을 조금 되돌릴 필요가 있겠다. 끔찍하게 맑고 더운 날이었으며 덕분에 하늘은 불가피할 만큼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낮게 날고 있는 구름도 인상적이었다. 원근감은 오롯이 그들의 손에 놓여 있었기에 구름의 양과 무게에 따라 때로는 하늘이 낮아지기도 했고 때로는 더 높아지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 머리 위에 커다란 천을 펼친 다음 그 표면에 역동적인 영상을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아니, 비행기를 타고 늦은 밤 마닐라의 허름한 공항 터미널에 내리던 순간까지도 이번 여행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냥 고속버스를 타고 교통체증이 심한 고속도로를 달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구를..
무릇 여행의 기쁨은 누군가 공항에 마중 나온 이가 있어 그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줄 때에 있지 않을까? 이 문장이 의문형인 이유는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술적으로 보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일이나 의무에 의한 마중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나와 D가 홍콩에 가던 세 번의 여행 첫머리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는 까닭 없이 서운해지고는 했다. 어쩌면 일부러 서운해져 우리끼리 더 잘 놀아보자고 다짐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슬픈 처지가 아니다. 마닐라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친구, B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자정이 넘는 시각이었던 탓에 혹시나 그가 곯아떨어져 나오지 못할까..
공항 사진을 올리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항 사진만 올리고 싶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이렇게 사진 정리하기 귀찮았던 적이 또 있나 싶다. 어느 정도 보정을 해줘야 조금이라도 성에 찬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필름 카메라는 참 편했다. 스캔 받은 파일을 크기만 줄여서 올리면 됐으니까. 올릴 사진을 고르는 데 애를 좀 먹긴 했지만, 대부분 어떤 글을 써야 하나 그 고민만 했으면 됐으니까. 마지막 홍콩 여행기의 첫 편에 유난히 공항 사진이 많았는데, 그걸 올리며 매우 신이 났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이유 없이 공항 사진을 만지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한없이 창백한 구조물에 불과한데 어떤 장면이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공항 사진엔 있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에 관하여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한국은 폭설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가을 날씨인데 말이다. 며칠 떠나있지도 않았건만 미친 듯이 춥고 마구 눈이 내리던 서울 풍경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게 72시간 전까지 현실이었고, 8시간 후부터 다시 현실이 될 그림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꿈을 꾸자. 몇 달 전에 떠나보낸 가을과 일단 재회하고 보자. 마지막 날이랍시고 그나마 일찍 일어나지 않았나. 지금은 아침과 제일 흡사한 시간이 아니던가. 가방 정리를 하면서 나흘간 너저분해진 기억도 쓸어 모은다. 이번엔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좋지 않았을까. 무엇이 만족스러웠고 무엇이 아쉬웠을까. 여행 계획서를 허투루 썼으니까 여행 평가서라도 제대로 작성해 봐야겠다. 하지 ..
걱정과는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정상회담 때문에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상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오하우 섬에 있는 국제공항은 최초로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가 세웠다 해도 믿을 정도로 낡았다. 여행의 시작과 종착을 책임지는 역할엔 지장이 없지만, 딱히 볼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공항은 터미널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버라이어티하다. 에이프런에 서 있는 비행기는 또 어떤가. 거대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아한 곡선에 혼이 빠져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불만이었던 이유는 출국 심사를 받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는데 흡연 구역이 하나도 없었..
1.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는, 때로는 그것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되기도 하는데, 책이나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소에 실제로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로맨스나 자극을 받은 누군가의 경험담, 한 번 스쳤을 뿐인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먼 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비포 선셋’의 만남을 떠올리며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방문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선 데보라 카를 기다리던 캐리 그랜트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세대가 다른 나는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찾게 되겠지만).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발상지와 경전 속 일화가 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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