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푸드의 자극적이고 획일적인 맛을 누가 싫어하겠느냐만, 나 역시 패스트푸드를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일부러 먹지 않으려고 한다. 중독은 순식간이고, 뒷감당은 평생이니까. 하지만 여행을 가면 이상하게 패스트푸드는 꼭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돈도 아낄 수 있고, 실패할 확률도 적으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한국에도 있는 글로벌 체인이라면 나라마다 차이가 나는 아주 사소한 지점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그런데 B가 소개한 패스트푸드는 필리핀에서는 유명하나 한국에는 없는 브랜드들이다. 특히 차이니즈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는 차우킹은 구전으로 안 것도 아니고 매장을 눈으로 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와 D는 원래 중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게 한국 한정, 그것도 고량주를 5천원에 파는 배달 전..
이미 전편에서 Y와 K를 맞이하기 위해 터미널 4에서 터미널 3으로 이동한 우리지만, 시간을 조금 되돌릴 필요가 있겠다. 끔찍하게 맑고 더운 날이었으며 덕분에 하늘은 불가피할 만큼 아름다웠다. 한국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낮게 날고 있는 구름도 인상적이었다. 원근감은 오롯이 그들의 손에 놓여 있었기에 구름의 양과 무게에 따라 때로는 하늘이 낮아지기도 했고 때로는 더 높아지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 머리 위에 커다란 천을 펼친 다음 그 표면에 역동적인 영상을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아니, 비행기를 타고 늦은 밤 마닐라의 허름한 공항 터미널에 내리던 순간까지도 이번 여행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냥 고속버스를 타고 교통체증이 심한 고속도로를 달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구를..
무릇 여행의 기쁨은 누군가 공항에 마중 나온 이가 있어 그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줄 때에 있지 않을까? 이 문장이 의문형인 이유는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술적으로 보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일이나 의무에 의한 마중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나와 D가 홍콩에 가던 세 번의 여행 첫머리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는 까닭 없이 서운해지고는 했다. 어쩌면 일부러 서운해져 우리끼리 더 잘 놀아보자고 다짐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슬픈 처지가 아니다. 마닐라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줄 친구, B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하면 자정이 넘는 시각이었던 탓에 혹시나 그가 곯아떨어져 나오지 못할까..
무라노 섬의 파로 선착장에서 LN선을 타고 부라노 섬으로 향했다. 앞으로는 부표가, 뒤로는 섬마을이 우리를 전송하는 아스라한 손짓을 보았다. 모터보트의 항해는 30분 남짓 이어졌다. 그동안 앉아서 쉴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몸이 지쳐 감각과 마음을 좀먹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색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 한 시간이라도 머물고 싶어 할 곳, 알고 있는 색깔의 이름이 몇 되지 않는 나 같은 어휘 빈곤자라도 그만큼이나 황홀해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중이니까. 몇 년 전, 어느 잡지에 실린 부라노 섬의 사진을 보고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며 감탄한 적이 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 매혹적인 나머지 현실감마저 없을 정도였다. 멀고 먼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건..
:: 여행을 돌이키다 보면 기억의 영리한 솜씨에 놀라곤 한다. 주인의 유불리에 따라, 주인의 기호에 따라 구분된 기억은 망각의 릴 위에서 빙빙 돌며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지, 얼마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예컨대 여행 중 느꼈던 피로와 실망, 날씨를 향한 불만들은 금방 잊히는 데 반해 사소한 감탄이나 미묘한 감동은 뻥튀기 기계에 넣은 곡물처럼 크게 부풀려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아주 매혹적이라서 지금도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행기 티켓 결제 버튼 앞에서 서성이게 한다. 똑같은 공식을 우리가 묵었던 내륙, 메스트레 역에서의 하룻밤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섬이든 육지든 유럽의 겨울이 주는 가없는 적막함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아름다웠고 후자는 황량했다. 시내..
:: 본래 이 카테고리의 2010년 유럽 여행기에 있던 글이지만, 네이버포스트에 올리며 글을 좀 수정하고 사진과 편집을 새로 만져보았다. 또 가고 싶다, 베네치아. :: 기체는 작았다. 아담한 기내 분위기와 종종 작은 동체가 요동칠 때 느낄 수 있는 스릴은 마음에 들었으나 이런저런 불편한 점도 많았다. 우리는 기체의 맨 뒷자리(35E, 35F)였는데 하나뿐인 화장실을 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28번 좌석까지 줄을 서고 있었다. 만약 이륙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저 앞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상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콜라를 먹으려면 1유로인가 2유로를 더 내야 하는 야박한 인심은 사소한 불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최악이었던 것은 기내식이었다. 비행기가 제 고도에 오르자마자 배가 고..
미리 이야기하자면, 베르사유 궁전 안에 들어가진 않았다. 두 해 전에 갔던 그곳은 내부도 정원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거울의 방은 얼마나 화려했던가. 정원은 또 얼마나 숲처럼 시야 끝까지 내달렸던가. 그러나 그걸 기억하면서도 다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저 밖에서, 카페 같은 데라도 앉아 있고 싶었다. 하늘이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서. 그냥 남들한테서 날 좀 떨어뜨려 놓고 싶어서. 좀 더 정확한 이유를 대자면 여기까지 오다가 보았던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두 젊은 여자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아마 베르사유 대학에 다니는 듯,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자는 돌길을 따라 내려가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어떤 모퉁이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껏 이 자리에서 수없이 오갔으리라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루브르에서 작품만 감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가 무엇인지 보기 위해 찾아든 세계 각국의 사람들도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재미있기도 하다. 지루함과 진지함을 오고가는 수많은 얼굴을 보다 보면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회랑을 통과해 들어가는 게 좋다. 빛이 만든 타원형 창 너머로 유리 피라미드가 보이는 지점. 그 기하학적인 지점이 나를 들뜨게 한다. 남자는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었다. 시를 짓고 있는 걸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유심히 보게 된다. 그리고 이내 그를 유심히 봐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단체 관람을 온 듯한 아이들(?)도 보였다. 루브르에 수집된 수십 만 점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분..
사람이 살다 보면 늦잠도 자고 약속도 놓치고 그렇게 하루 계획을 날리는 날도 있는 법이다. 아는 거라곤 쥐뿔도 없는 타지에선 말할 것도 없다. 평소보다 단단한 긴장감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아침잠이 많은 나는 나태를 이기지 못하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곤 한다. 하와이의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울렛에 가기로 한 계획은 좋았는데 잠들기 전 혼자 술을 너무 홀짝였는지 마지막 셔틀버스가 호놀룰루에서 출발하는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나고 말았다. 프리미엄 아울렛은 호놀룰루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보통 셔틀버스 아니면 렌터카를 이용한다. 물론 나에겐 둘 중 어느 것도 없었다. 난감했다. 다른 계획을 세워두지도 않았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홀로 일광욕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잠깐. 난 태우는 건 질색이다...
파리에 갔는데 에펠탑을 못 보고 왔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이 좁은 도시 안에선 어디를 가든 기어코 고개를 내밀어 자신을 드러낸 에펠탑을 볼 수 있으니까.사실 한국에서도 너무 쉽게 에펠탑의 모형이나 사진, 그림을 볼 수 있으니이만큼 친숙한 파리의 상징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파리를 다녀온 여행담에서 에펠탑은 그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일단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봤을 게 분명한데다가가까이 가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 않고,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전경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으며,매 정각 깜빡이는 조명도 몇 번 보다 보면 질리게 마련이니까."에펠탑 진짜 크고 예쁘더라."그 이상의 감상을 우리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다.사진만큼은 정말 많이 찍게 된다고.굳이 에펠탑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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