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두세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면 루아르 지역에 닿을 수 있다.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인 루아르 강을 끼고 왕족과 귀족들이 세운 수많은 고성 때문이다.그때가 15~16세기라던가.한국에선 보통 두세 군데의 성을 보고 파리로 돌아오는 코스가 인기지만,일본 같은 경우엔 아예 며칠씩 머물며 고성만 보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정확히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모르겠으나 프랑스를 향한 일본의 애정은 참으로 놀랍다. 나도 투어에 참여해 루아르 지역을 가게 될 기회를 얻었다.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므로 다시 없는 행운이었지만,사실 파리의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았다.고속도로와 휴게소의 시는 귀족의 귀를 즐겁게 했던 칭송시보다 훨씬 아름다우니까. 파리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
걱정과는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정상회담 때문에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상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오하우 섬에 있는 국제공항은 최초로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가 세웠다 해도 믿을 정도로 낡았다. 여행의 시작과 종착을 책임지는 역할엔 지장이 없지만, 딱히 볼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공항은 터미널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버라이어티하다. 에이프런에 서 있는 비행기는 또 어떤가. 거대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아한 곡선에 혼이 빠져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불만이었던 이유는 출국 심사를 받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는데 흡연 구역이 하나도 없었..
하와이를 떠나는 날 아침. 공항에 갈 때까진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아침 산책을 나섰다. 아침 산책. 듣기만 해도 여유가 넘치고 평화로우며 그날 하루 전체를 의미 있어 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무엇이든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마법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어렵다. 매일의 출근을 마법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듯이. 아침 산책이라는 걸 몇 번 해본 적도 없고, 그마저도 여행이나 가야 겨우 하곤 했던 나로서는 이 생소한 행위 자체가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장이오,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이 섬처럼 여유로운 사람이 되자. 하루라도 지속되면 다행인 그 수많은 다짐들. 거리는 벌써 관광객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곳저곳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대했던 산책의 묘미는 대번에 쭈글..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았을 때,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그냥 그것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내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있을 땐 의미가 없지만, 모이면 ‘못다 한 이야기’라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된다. 불 꺼진 꽁초는 한 개비일 땐 쓰레기일 뿐이지만, 수북하게 쌓여있으면 그 어떤 곳이든 저 있는 곳을 재떨이로 만든다. 버려진 필터 조각들의 집합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들도 ‘불필요한 것들의 사전’이 있다면 저마다 목차 하나씩을 차지하고 그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할 테니, 과연 다수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나에게 남은 하와이 이야기, 정확히 말하면 아직 소개하지 못한 장소가 몇 된다. 오하우 섬에 있는 폴리네시안 문화센터, 돌 농장과 ..
해가 지고 밤이 되자 호텔은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방을 나섰을 때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복도는 잠잠했다. 해변이나 중심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이라 호텔 주변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림 같은 소음이 오히려 적막감을 더했다. 나는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그걸 눈으로 보고 기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육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와 낯선 이가 서로가 있던 공간을 교환했다. 밤의 호텔에 친근한 미소와 낭랑한 인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눈인사만 주고받는다. 소리를 내지 않아 서로의 밤을 방해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그를 태우..
:: 빅버스 오, 빅버스여. 우리를 스탠리까지 태우고 달렸던 크고 날렵하며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리의 붉은 탕아여. 태양은 온화하고 바람은 열기에 차있지 아니하니 너의 활짝 열린 머리 위에 앉는 게 이보다 더 안락할 수 있을까. 오늘은 새로운 길로,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길로 우리를 인도할 테요, 과감히 딱딱한 객석에 몸을 파묻고 카메라를 높이 들어 원숭이처럼 환호하리라. 그러니까 오늘의 빅버스 코스는 홍콩섬 일주였고, 나와 D도 가본 적 없는 완차이와 코즈웨이 베이를 지나 마지막으로 빅토리아 피크 아래쪽을 보게 될 터였다.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내리자고 얘기했지만, 사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버스틀 타고 달리다 보면 관성에 의해 계속 가게 된다. 하나의 코스를 삼..
:: 란콰이퐁 샤워를 마치자 살 맛이 났다. 욕실은 하나, 다 큰 남자가 셋. 혼전이 펼쳐질 양상이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한 명이 씻으면 다른 두 명은 술 내지는 커피를 마시거나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거나 그도 아니면 모바일 게임을 한다.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맞춰놓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호텔방이 곧 낙원이다. 그뿐이랴. 편의점에서 탄산음료 컵에 가득 채워 얼음을 공수하고, 토닉 워터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음료도 준비해 진을 즐겼다. 실수로 이 리터나 사온 바로 그 술이다. 술잔을 들고 야외 로비로 나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컵 표면에 이슬이 맺히다가 짤랑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얼음보다 더 시원한 소리다. 파도 소리 대신 자동차 엔진 소리가 공명하는 도시 한복판이라 해도 휴양지가 부럽지 않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루브르에서 작품만 감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가 무엇인지 보기 위해 찾아든 세계 각국의 사람들도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재미있기도 하다. 지루함과 진지함을 오고가는 수많은 얼굴을 보다 보면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회랑을 통과해 들어가는 게 좋다. 빛이 만든 타원형 창 너머로 유리 피라미드가 보이는 지점. 그 기하학적인 지점이 나를 들뜨게 한다. 남자는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었다. 시를 짓고 있는 걸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 유심히 보게 된다. 그리고 이내 그를 유심히 봐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단체 관람을 온 듯한 아이들(?)도 보였다. 루브르에 수집된 수십 만 점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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