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뭘 하는 걸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혼자 하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일을 좋아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진 찍기가 그렇다. 여행은 아직 잘 모르겠다. 여행은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제일 중요한 만큼 죽이 잘 맞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 편이 낫겠지. 하지만 난 나를 꽤 좋아하니까 혼자, 나와 함께 여행하는 것도 좋다. 그러면 글과 사진은 절로 따라오니까. 예전엔 그러지 못했는데 언젠가부터 식당에서 혼자 밥먹는 게 어색하지 않다. 죽이 잘 맞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식사도 여행만큼이나 고역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회성이 아주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마저도 다 깎여나간 모양이다. 툭하면 몸도 마음도 체한 것처럼 무거워지기에 십상이니까. 어쩌다..
빅 아일랜드의 볼케이노 내셔널 파크 정상에 올랐다가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검은 땅을 달렸다. 좌우로 쫙 펼쳐진 흑색 사막이 파괴된 후의 세상을 연상케 했다. 여행안내서에선 “우주적인 풍경”, “달에 온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정도로 이질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젠간 벌어질 거대한 사건의 예고편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마그마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멀리 흘렀는지 빅 아일랜드는 간척사업을 하지 않아도 절로 영토를 늘려가는 곳이다. 1970년대 깔아 놓은 아스팔트 도로가 1983년 분출 때 묻혀 일부만 드러난 광경을 봤다. 딱딱하고 단단해 보이는 아스팔트가 이토록 쉽게 잘려나갈 수 있다니, 재난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경외감이었다. 그런데 만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만난 구안은 스패니쉬계 미국인이다. 그는 나를, 아니 내 여행용 가방을 보자마자 "그거 지갑이야? 너 게이냐?"고 물었다. 너의 성향은 존중하지만 열 시간 넘게 옆에 타고 가기엔 좀 그렇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덩치도 큰 게 가리는 것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친절하게 이건 지갑이 아니라 여행용으로 간편하게 들고 다니는 가방이라고, 나는 게이가 아니니 걱정 말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정말 한숨을 돌렸는지(?) 그 때부터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구안은 미군이다. 독일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3년 간 한국으로 발령이 났다고 한다. 한국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으니까 이번이 처음이라고, 사실 한국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다고 털어놓았다. 동양의 작고 생소한 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난생 처음 항공사 라운지를 이용해 봤다.내가 비즈니스 석에 앉는다거나 엄청난 마일리지를 쌓아 회원 등급이 높아져서는 아니다.그냥 운이 좋았다. 이곳은 별세계 같았다.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즐기거나 쇼파에 앉아 쉬는 건 물론 샤워도 할 수 있는 곳.맛있는 음식이 뷔페식으로 제공되고 술이나 음료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마치 고급 호텔에 온 것만 같은데 그 모든 게 무료인 곳. 여행이나 출장을 이런 곳에서 시작하고 이런 곳에서 쉼표를 찍으며 이런 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면어떤 기분일까?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여행은 피로하다는 것이다.장시간의 비행, 시차 적응, 이국에서 느끼는 긴장감.그 모든 게 사람을 지치게 만듦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런 곳이 존재할 거라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멋진 라..
꽃은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겠다. 음식 사진을 잘 찍진 않지만 먹는 건 좋아한다. 꽃 사진도 잘 찍지 않지만 그렇다고 꽃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꽃의 이름을 외우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해 본 적도 없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경의를 표하기는 한다. 벚꽃을 좋아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뭇가지 위에 흐드러지게 핀 전체를, 바람에 연분홍빛 물결로 흔들리는 그 군집 자체를 좋아한다. 메마른 사람이라 탓해도 할 말은 없다만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돌덩이 취급받는 건 조금 억울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며 예전엔 싫어했던 게 좋아지기도 하니까. ..
휑뎅그렁한 도로에 컨테이너로 만든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접시 대신 도시락 용기를 주고, 열 가지 중국 요리 중 세 가지를 마음껏 고를 수 있으며, 거기에 음료수까지 포함이다. 홀로 앉아 코코넛 소스에 빠진 새우를 포크로 찌르고 있으려니 끝없이 이어진 황야를 달리다가 외딴 휴게소에 차를 세우는 기분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 식당 건너편에도 컨테이너로 만든 가게가 하나 있는데 둘 다 황량한 대지와 잘 어울렸다. 내 취향이 그렇다. 컨테이너로 만든 단층 건물을 보고 있으면, 더군다나 그것이 식당이나 잡화점으로 쓰이고 있다면, 가슴 한구석에 작은 구멍이 뚫려 마음이 그쪽으로 쓸려 들어가듯 아득해진다. 마치 아름다운 회화 앞에 선 것처럼 그런 풍경을 오래 두고 보게 된다. 빅 아..
며칠 째 에스프레소나 따뜻한 카푸치노만 마시니까여름의 음료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래서 찾은 별다방.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어쩜 이렇게 한국과 다를 게 없을까 감탄스럽기만 하다.세계적인 체인의 커피하우스는 마뜩찮은 방법으로전세계를 연대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이 더운 날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물보다 반갑더라. 이성과 욕구는 어찌 이리 따로 노는 것인지. @Frankfurt, Germany canon A-1kodak 100
산 피에트로 광장은 긴 회랑으로 둘러쌓여 있다. 광장 어디에 서면 회랑의 여러 기둥이 하나로 겹쳐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땡볕에 잠깐 서서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기둥이 겹쳐보이는 신기한 자리보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더위를 피할 목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회랑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회랑 기둥의 주춧돌에 둘러앉아 더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과연, 이곳은 태양에 노출되지 않고 종종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식히며 산 피에트로 광장의 모습을 지켜보기 좋은 곳이다. 몇 시간이고 앉아 식수대에서 뜬 물을 나눠 마시면서 이탈리아의 여름을 이겨내기. 이상하게 차분해지는 경건한 분위기는 덤. @Vatican City canon A-1 + 50mm superia 200
:: D가 날 깨웠을 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나흘 내내, 결국 홍콩의 아침을 본 적이 없다. 잠들기 전, 오전에 짬을 내서 어딜 다녀오자고 계획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고, 이제 와선 시간도 없었다. 출국 시각까진 그럭저럭 여유가 있었지만 지체하진 않기로 했다. 대충 씻고 모자를 눌러쓴 후 짐부터 정리했다. 며칠 동안 신세를 졌던 호텔방엔 누군가 장기 체류를 하다가 막 떠난 현장처럼 질서와 어지러움이 공존했다. 수건은 매일 새로 (카트에서 우리 마음대로) 가져왔지만 룸 메이킹은 한 번도 받질 않았다. 방을 청소하는 시간 전에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 사실 침대 시트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펴는 것 말곤 정리할 거리 자체가 없는 방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침대마저도 반은 캐리어..
8월 중순의 로마는 덥다.고대의 시멘트는 햇살 아래서 창백한 베이지색으로 빛나 눈이 부시고현대의 아스팔트 위를 지날 땐 숨을 쉬기가 힘들다.그러니 식수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안 그래도 비싼 물값, 바티칸 시국 주변에선 놀라울 정도까지 올라가니까. 아마 수백 년 전에도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아이들이 똑같이 물을 받아 똑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에 끼얹었을 것이다.역사책에도 한 번쯤 언급됐을 배수로에 여전히 깨끗한 물이 흐른다니.로마를 걸을 땐 시계를 잘 봐야 한다.여름 날엔 특히 현실감을 잃기 좋은 도시니까. 그런데 이 더운 날에 이럴 수 있는 건 무슨 재주일까? @Roma, Italy canon A-1 + 50mmsuperia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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