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이른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네 시 반에 눈을 떴다. 하늘이 아직 짙은 남색을 게워내지 못한 시각이었다. 헐레벌떡 준비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오자 지나치게 부산을 떤 탓인지 갑자기 힘이 쭉 빠지고 울적해졌다. 마우이 섬이나 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낯선 이들과 함께 15인승 밴에 구겨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람이 이런 기분일 거란 생각이 들자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워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막연한 기피는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여행 당일 아침에 찾아온다. 이런 곤혹스런 증후군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할 수 있는 만큼 빨리 터미널에 들어가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2층짜리 낡은 건물이 길게 이어진 호놀룰루..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물로 연명하다가 점심시간이 지났다. 오전 내내 땡볕 속을 걸어 다녔더니 힘이 없다. 뭘 먹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뭘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스팸 무스비조차 땡기지 않는다. 그냥 아무거나 대충 밀어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집에서 혼자 휴일을 보낼 때와 똑같다. 음식을 먹는다기보단 최소한의 열량을 공급한다는 느낌에 가까운 바로 그 순간 말이다. 알라 모아나의 푸드코트에 들어섰지만 메뉴 고르기가 어렵다. 일단 종류가 너무 많다. 한식, 양식, 중식, 일식에 태국식까지.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세계 음식의 바이블을 보는 기분이었다. 전체를 세 바퀴를 돌고 나서야 마음이 선다. 오늘의 정답은 하치바 상 - 일본식 그릴요리 전문점 - 이 요리해 주는 치킨 데리야키 플레이트다...
오하우 섬엔 수많은 쇼핑센터가 있지만,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두 곳을 꼽으라면 아마 첼시 그룹에서 운영하는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Waikele Premium Outlet과 알라 모아나 센터Ala Moana Center가 아닐까 한다.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은 우리나라에선 여주와 파주에 자리 잡은 신세계 첼시의 아웃렛과 형제라고 할 수 있고, 알라 모아나 센터는 오하우 섬에선 가장 크고 미국 내에서도 손으로 꼽힐 만큼 거대한 아웃도어 쇼핑몰이다. 특히 알라 모아나 센터는 와이키키 중심가에서 불과 2km 거리에 있으니, 쇼핑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놀이 공원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쇼핑센터라면 그건 그냥 관광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바다로 가는..
무엇으로부터의 피로인지도 모른 채 그냥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날을 거듭할수록 늘어가는 욕심과 날이 거듭되어도 변할 줄 모르는 두려움이 공모하여 빚은 피로일 것이다. 나무 그늘에 몇 시간씩 누워있는 오후를 상상한다. 책을 읽다가, 무거운 눈꺼풀 아래 쓰인 꿈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 분명 읽긴 했을 텐데 생소하기만 한 문장을 다시 읽어도 좋겠다. 실수로 한 곡 반복을 하는 바람에 한 시간 내내 같은 곡을 들어 놓고선 눈을 뜨자마자 앨범이 한 바퀴 돌았구나 착각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달려온 바람이 나한테 걸려 넘어지길 기다린다. 그러면 길고 뾰족한 잎이 몸을 흔들며 그늘의 가장자리를 흩트린다. 사라락 옷깃 스치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이파리와 이파리..
"술을 홀짝이며 생각할 시간을 가져. 내가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6층에서 맞는 바람은 엄청났다. 호텔 사이로 달려드는 바람, 운하를 스쳐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 정신없이 건물을 오르내리는 바람. 폐쇄된 수영장을 따라 건물 한 바퀴를 돌면서 머리카락이 멋대로 춤을 추는 느낌을 즐겼다. 이대로 날아오른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매일 밤 난 너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해." 밤은 화려하지 않았다. 호텔방마다, 을씨년스러운 주차장마다, 건물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간간이 소음이 들려오는 거리마다 백열등 몇 개가 섬처럼 반짝일 뿐이었다. 커튼이 쳐진 건너편 호텔 창문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은 뭘 먹었을까? 창밖을 보며 마시고 있는 술은 맥주일까 ..
처음엔 평범한 갤러리인 줄 알고 걸음을 멈췄다. 하와이 미술계의 동향을 파악할 만한 감식안이나 취향은 없지만, 그냥 한번 기웃거려 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오며 가며 보았던 하와이의 그림은 자연이나 원주민을 주제로 한 강렬한 색채의 작품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실내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업실과 전시장을 겸하는 공간인가 했더니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공동 작업인가? 그런데 정작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아기 기저귀를 가는 부모처럼 어색해하고 당혹스러워하는 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캔버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붓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작업실이자 전시장이며 동시에 미술 학원이었던 ..
72번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오하우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마카푸우 포인트가 나온다. 오하우의 모든 곳을 가보진 못했으니 그 말이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확 트인 전망을 보면 굳이 반대할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겠다 싶다. 오하우 섬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나와 대동소이할 다른 사람들도 마카푸우 포인트에 거는 기대가 컸다. 최소한 렌즈를 꽉 채울 멋진 풍경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비가 왔다.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연청색에서 남청색으로 바뀌는 바다는 먹구름이 끼기 전 딱 몇 분 동안만 제 빛깔을 보여주었다. 그 명암과 채도와 색조는 사람의 힘으론 재현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면 조용히 사라질 정도로 겸손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
옷에는 문명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부와 권력을 뽐내기 위해 사람은 옷을 입었다. 의복이 필수품에서 사치품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던 인간이 자아실현과 명성, 지위에 대해 고민하게 된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다. 극한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죽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사람은 없다. 죽음만큼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사망 선고를 피하기 위해 입을 뿐이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옷은 우리를 한정 짓는다. 이것은 얼마나 제 몸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는지, 얼마나 개성 있고 세련된 옷을 입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에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나를 일관성 있게..
하와이 여행기라면, 최소한 하와이 가이드북이 소개하는 몇 군데 정도는 언급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는 사실 증명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두 시간 동안 오하우의 명소 세 군데를 돌아보고 남은 건 메모 열 줄과 사진 몇 장뿐이었다. 그럼에도 물 먹인 소처럼 부풀려 스케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나 자신에게 그곳들을 잊지 말라고 환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나 감상을 끄집어내긴 어렵지만 가끔 남국의 정서를 되살리고 싶을 때 꺼내보기 좋은 기억으로서 말이다. 햇살은 아침나절부터 강렬했다. 가이드는 일정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마음이라도 가다듬으라는 듯, 해안 도로에서 툭 튀어나온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를 감상할 시간을 줬다. 선글라스를 준..
만약 당신에게 많은 돈이 있다면 이런 곳에서 사는 건 어떨까? 오하우 섬 일주는 호놀룰루에서부터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섬을 도는 투어다. 가이드는 15인승 밴의 가속 페달을 밟으며 처음이니까 흥미로운 곳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하와이 카이. 섬 남동쪽에 위치한 부촌으로 하와이의 비버리 힐즈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이 그에게 흥미로운 곳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지기 전, 호놀룰루 시내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하게 닦인 도로로 접어들었다. 금과 옥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휘황찬란한 궁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저택이라 불러줘야 예의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단독 주택들이 이어졌다. 하와이에서도 알아주는 부자들이 모인 하와이 카이 커뮤니티에 참여하려면 못해도 270만 달러 이상의 집을 사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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