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는, 때로는 그것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되기도 하는데, 책이나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소에 실제로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로맨스나 자극을 받은 누군가의 경험담, 한 번 스쳤을 뿐인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먼 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비포 선셋’의 만남을 떠올리며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방문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선 데보라 카를 기다리던 캐리 그랜트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세대가 다른 나는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찾게 되겠지만).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발상지와 경전 속 일화가 벌어..
하와이 여행기라면, 최소한 하와이 가이드북이 소개하는 몇 군데 정도는 언급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는 사실 증명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두 시간 동안 오하우의 명소 세 군데를 돌아보고 남은 건 메모 열 줄과 사진 몇 장뿐이었다. 그럼에도 물 먹인 소처럼 부풀려 스케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나 자신에게 그곳들을 잊지 말라고 환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나 감상을 끄집어내긴 어렵지만 가끔 남국의 정서를 되살리고 싶을 때 꺼내보기 좋은 기억으로서 말이다. 햇살은 아침나절부터 강렬했다. 가이드는 일정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마음이라도 가다듬으라는 듯, 해안 도로에서 툭 튀어나온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를 감상할 시간을 줬다. 선글라스를 준..
만약 당신에게 많은 돈이 있다면 이런 곳에서 사는 건 어떨까? 오하우 섬 일주는 호놀룰루에서부터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섬을 도는 투어다. 가이드는 15인승 밴의 가속 페달을 밟으며 처음이니까 흥미로운 곳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하와이 카이. 섬 남동쪽에 위치한 부촌으로 하와이의 비버리 힐즈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이 그에게 흥미로운 곳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지기 전, 호놀룰루 시내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하게 닦인 도로로 접어들었다. 금과 옥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휘황찬란한 궁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저택이라 불러줘야 예의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단독 주택들이 이어졌다. 하와이에서도 알아주는 부자들이 모인 하와이 카이 커뮤니티에 참여하려면 못해도 270만 달러 이상의 집을 사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여행을 갈 때마다 노트를 쓴다. 일정에 따라 얇은 공책 반 권이 되기도 하고, 한 권을 다 쓰고도 모자라 중간중간 여백을 찾아다녀야 하기도 한다. 보통 공항철도에서부터 쓰기 시작해 귀국편 비행기 안에서 마무리를 짓는데, 한 번도 정의 내려 본 적은 없지만 내심 여행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하던 지점과 대체로 일치하지 않을까 한다. 여행을 떠난다는 실감이 날 때 그 기분을 노트의 첫 문장으로 옮긴다. 현실에 착륙하기 직전엔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며 안전 벨트를 조인다. 펄럭펄럭 페이지를 오가면서 여행을 펼치고 덮는다. 가방을 열어보자.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거나 안전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면 여행자에게 남는 필수품은 카메라가 될 것이다. 사진은 수많은 풍경과 상황,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기억하는 ..
호놀룰루 칼라카우아 거리에서 녹색 대문 하나를 봤다. 크고 투박한 글씨체로 '인터내셔널 마켓 플레이스'라 쓰여있는 간판 밑에 서자 이 골목 안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빽빽하게 들어선 노점상으로 미루어 보아 토산품을 파는 재래시장 같긴 한데, 누가 재래시장에 인터내셔널이란 수식어를 붙인단 말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같은 근거 없는 명제를 추출해낸 사고방식이 여기에도 적용됐단 말인가? 야시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좁은 골목, 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사위가 잠잠해졌다. 시장 입구는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이 한 데 모여 혼잡스럽기까지 했는데, 여기엔 돌아다니는 행인조차 거의 없었다. 조명도 어두침침해서 건물과 골목 사이엔 회색 여백이 팽배했고 화려한 색상의 ..
하와이에서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자동차 번호판이다. 그 네모난 금속판 위엔 항상 알록달록한 무지개가 떠있다. 시선을 이리 돌려도 보이고, 절로 돌려도 보인다. 어쩐지 귀여운 장난 같아서 속 안의 심각한 매듭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다. 물론 이곳이 꿈과 희망에 가득 찬 섬이라 그 상징으로써 그려놓은 건 아니다. 국지성 비가 자주 내리는 하와이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무지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무지개를 처음 본 건 도착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내로 진입할 즈음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해가 멀쩡히 떠있어도 꿋꿋하게 내리는 여우비였다. 남국의 섬에선 흔히 있는 일이겠거니 하는데, 저 멀리 아치형의 프리즘이 반짝였다. 빨. 주. 노..
"하와이에 혼자 오셨어요?" 의아한 눈빛과 함께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그러면 대답할 구실이 있으면서도 입 열기가 망설여졌다. 어째서 "혼자 오셨어요?"도 아니고 "하와이에 혼자 오셨어요?"일까. 남자 혼자 하와이에 온 걸 이상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해할 순 있다. 신혼부부, 가족, 동창 모임 등 하와이행 비행기를 타는 다양한 사람 중에서도 이만큼 희박한 경우의 수가 없으니까.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으면, 문득 함께 차를 탄 이 남자가 같이 온 일행이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들은 어디까지 추측하고 어떤 상황까지 상상하게 될까. 외톨이 여자는 눈빛에서 사연을 읽을 수 있지만 외톨이 남자는 의뭉스러워 보이기만 한다. 돈 많은 한량으로 치부하려 해도 지갑이 두툼해 보이는 행색은 아니다. 사..
낮 처음 호놀룰루 시내로 들어갈 땐 곳곳에 콘크리트 젠가가 쌓여있는 줄 알았다. 도시 자체가 급하게 성장하고 급하게 지어졌다는 인상이어서 섬 어딘가에 성장 촉진제가 꽂혀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화의 개성이나 건축적 미학보다 실용성과 유용성에 무게를 두는 경향 때문일까. 이국적인 느낌은 팔라우나 로마의 외곽도로, 아니 몇 시간 전 떠나온 인천 공항만도 못했다. 우선 차에서 내려 거리를 걸어 보아야 차창 너머로는 보이지 않았던 대상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야자수들은 늙고 성급한 도시에 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서너 그루씩 옹기종기 모여서 웬만한 건물 높이만큼 뻗어 올라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그네들은 마치 익살스럽게 조각된 토템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에서 춤판이..
하와이에 갔을 때 하필이면 2011 APEC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현지 여행사들은 공항으로 이어진 H1 고속도로와 호놀룰루 시내가 언제 어떻게 통제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초긴장 상태였고, 관광객들은 정상 회담엔 무심한 채 섬이 어서 낙원을 보여주길 기대하느라 바빴다. 걱정하는 무리와 걱정을 하고 싶지 않은 무리 사이에서 그나마 희망적이었던 건 대폭 강화된 경찰력 덕분에 마음 놓고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겠다는 우스갯소리 정도였다. 실제로 회담으로 인한 불편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외곽 도로가 통제될 때는 시내로 들어오는 교통량이 현저히 줄어들어 도로 위에 남겨진 모든 것들이 평소보다 유쾌한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하나우마 베이 같은 관광지의 사정은 조금 달라서 종종 해변이 통제되는 일도 있긴 했다. 외..
어딜 가든 표지판을 눈여겨 봐. 그 나라 말로 뭔가를 설명하거나 경고하려는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어. 아니면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구나 교사의 얼굴을 하고 있거나. 표지판을 보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돼. 드 보통이 말했지, "어떤 자리에 고향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것을 대신해서 자신의 성향에 더 들어맞는 낯선 대상이 있을 때 이국적인 정서를 느낀다"고. 나한텐 그것이 표지판, 푯말, 대충 그려 놓은 낙서 따위인 셈이야. 이등변 삼각형, 길쭉한 마름모, 옆으로 퍼진 직사각형과 완벽한 곡선의 원. 꼴도 색도 제각각인 바탕 위에 다른 언어가 쓰여있는 게 좋아. 아무리 많은 외국인 사이에 있어도 푯말을 한 번 올려다보는 것만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믿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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