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야제 종로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전집에 오늘따라 사람이 없다. 언제나 일 층은 물론 지하까지 만석이었는데 원하는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 Y는 가운데쯤에 자리를 잡고 D를 기다렸다. 평소 야근은 내 앞에 앉은 Y의 몫이지만, 여행 전날엔 불운의 여신이 항상 D의 편이 된다.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D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 D는 홍콩 여행은 비행기를 타는 순간이 아니라 떠나기 전날 오후, 여기 서울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 정의하곤 했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나와 Y의 상황에 입력한다면, 우린 지금 여행의 동반자가 짧은 휴가를 가는 와중에도 일거리를 잔뜩 챙겨 나온 꼴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작년 9월에 홍콩으로 뜨기 전에도 셋이 술을 마셨다. 그땐..
아침 햇살이 비껴 반짝이는 우아즈 강변엔 어떤 특별한 장면이 있는 게 아니었다. 조깅을 하는 마을 사람들을 한둘 지나쳐 보내고 나면 다시 찬 바람과 정적이 그 자리를 채웠다. 너무나 한가해서 이대로 마을 어딘가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 늦잠을 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천박한 간판도 없고 지나친 도태도 없이 오랜 세월 이대로 쭉 이어져 왔을 모습은 우리네 시외 작은 고장이 배웠음직한 미덕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 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공동묘지에 동생과 함께 눕지 않았다면, 이 작은 마을은 이토록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리라. 고흐의 엄청난 팬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의 수많은 그림과 그 만큼 수많은 편지를 보고 읽은 사람으로서 그가 걸었던 길 중 하나를 걷기로 했다. 작은..
그림은 실제로 눈앞에서 볼 때가 제일 좋지만 사진에 담아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 가지 각도로 고정되고 색온도에 따라 색감이 틀어져 원본과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림을 잘 못 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림을 찍음으로써 위안을 삼자는 심산이기도 하지만. 피그말리온 효과까진 아니어도 가까이에서 찍은 그림은 그 자체로 한 장의 사진을 그림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액자 주변의 실사조차도 누군가 붓으로 그려낸 듯한 결과물로 바뀐다. 그 비현실적인 느낌이 좋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노력에 비하면 셔터를 누르는 건 턱없이 쉬운 일이라 무임승차를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몽마르트 언덕에선 건물의 벽이 유화 물감을 바른듯 진득한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거리 전체가 거대한 회화로 보이기도 했다. 그림 ..
:: 내가 사겠다며 D를 끌고 간 곳은, 사실 무슨 대단한 곳이 아니라, 그냥 스타벅스였다. 스타의 거리로 들어서기 전에 이 층짜리 스타벅스가 하나 있었는데, 딱 봐도 야경이 끝내줄 것 같은 명당이었다. 주문을 하고 혹여나 앉을 자리가 없을까 전전긍긍하며 이 층으로 올라갔지만 의외로 빈자리가 많았다. 처음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고스란히 몰려오는 더위와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절대 시원하진 않다.) 지칠 줄 모르는 모기떼 때문이었다. 온종일 카페인 섭취도 못 했고 갈증도 났다는 표면적인 동기를 떠나서, 내가 굳이 스타벅스를 찾은 이유는 외국에 가서 꼭 한 번은 맥도널드를 찾는 이유와 같다.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같은 거대 프랜차이즈 기업의 매장들은 문명화된 ..
:: 몇 시간 전에 먹은 기내식만으론 피로를 감당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호텔로 오며 지나쳤던 현지 식당들을 떠올려 봤지만, 지금 당장 도전하긴 무리였다. 안전한, 보장된, 그러면서 우리가 좋아할 만한 메뉴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햄버거 같은. 방 크기에 적응을 좀 하고 나서 (다시 들어올 때 또 놀라면 안 되니까) 호텔을 나섰다. 로비엔 페인트 냄새와 분진이 떠돌고 있었다. 계단 한쪽은 막힌데다가 형편없이 좁아서 단체 두 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맞닥트려도 엉겨붙어 지나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면 최소한 호텔 외관보단 그럴싸하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니 똑같이 뜨겁고 습한 거리라도 발걸음이 가볍다. 지도 없이 낯선 길을 따라 걸으며 여행의 즐거움 중에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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