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생각보다 한국에, 서울에, 일상에 적응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28일이 객관적으로 길다곤 할 수 없겠으나 이렇게 쉽고 빠르게 꿈이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만에 D를 다시 만나 술을 마시며 "우리 갔다왔던 거 맞지?"라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의미가 떠나기 전보다 더 희미해졌다. 여행의 기억이 그러했듯 현실도 수면 아래 세상처럼 흐릿해졌다.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온 건 음식이었다. 여행 중에는 달고 느끼한 그곳의 음식이 맞지 않았는데, 이젠 맵고 짠 한국의 음식이 맞지 않는다. 원래 짜게..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진 않았다. 새벽은 말근 쌀뜰물처럼 뽀얗게 빛났고 단 한 번 뿐인 여명을 저버리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 후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키보드를 펼쳤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D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어쩌면 이땐 거의 체념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노트를 많이 정리하진 못했다. 좀 더 아침이 묽어졌다. 샤워를 하고 짐을 싼 다음 일어날 시간이라며 D를 깨웠다. 서호에서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체크인 카운터는 열리지 않았지만 한국말을 쓰는 동향의 얼굴이 자주 보였다. 배가 고팠다. 남은 돈이 15만 5천 동이었는데 쌀국수 두 그릇에 생수 한 병을 사자 딱 맞아떨어졌다. 1천 동 하나까지 털어냈다. 직원은..
28일 간의 기록. 28일 동안 기차와 배에서 잔 날을 포함해 모두 열다섯 군데의 숙소에서 묵었다. 가장 많이 숙소를 옮긴 곳은 라오스의 방비엥이었다. 우리는 끝없이 이동했다. 택시, 툭툭이, 송태우, 시내버스, 미니밴, VIP 버스, 열차, 자전거, 오토바이, 슬로우 보트, 스피드 보트, 크루즈, 카약, 비행기 등을 탔으며, 무엇보다 두 다리가 최고의 이동수단이었다. 현금으로 가져 간 1,280달러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ATM기는 두 번 이용했는데 한 번은 재미삼아 해봤고 한 번은 당장 쓸 돈이 없어서 해봤다. 현지에서 카드로 계산한 비용 중 가장 비쌌던 건 2박 3일 하롱베이 크루즈 투어였다. 그리고 단시간에 최고 비용을 쓴 건은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가는 베트남 항공이었다. 우리는 한 시간만..
호안끼엠 호의 북쪽, 구시가지를 향해 가는 길은 아주 북적였다. 현지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가 즐비하고 주차된 오토바이가 인도를 점령하고 앞서 나가려고 애쓰는 달리는 오토바이는 차도를 점령했다. 하노이에서 안전하게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걷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오토바이를 무시해야 한다. 그들이 알아서 나를 비켜가 주니까. 종종 경적을 울리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 역시 무시하면 그만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몰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류는 정장을 입고 타는 이들이다. 오토바이와 정장은 얼마나 부조화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잘 어울리는지. 두 발 전동차를 타고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남자들은 넥타이를 휘날리고 여자들은 다리를 꼭 붙여 치마가 뒤집어지지 않게 애쓴다. 여..
어제 술을 꽤 마셨음에도 푹 자서 그런지 숙취가 없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침대에 누워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할 힘을 내려고 애쓰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든 말든 오늘이 마지막 날이든 말든 나는 꾸물거리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가고 싶지 않거나 하지는 않다. 단지 또 떠나고 싶을 뿐이다. 28일이 이렇게 흘렀으니 다음엔 또 다른 28일을, 내키면 280일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술자리에서 D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곧 결혼을 하는 그로서는 다시 이런 긴 여행을 떠나기가 어려울 거라고. 내 코가 석자인데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직전이니 오히려 축하할 일이다. 새로운 삶은 여행, 그 이상일 것이다. (사실 이 말..
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고 온 마지막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 예약자인 내 이름이 쓰인 웰컴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그걸 보자 정말 여행의 끝에 도달했다는 실감이 났다. 사진을 찍은 후 무료로 제공되는 바나나와 초록색 귤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부드럽고 과육이 실한 동남아시아의 과일들. 너희도 일단 안녕이구나. 우리가 잡은 호텔은 서호 주변에 위치했다. 굳이 이 호텔을 잡은 이유는 카지노였다.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재미있게 즐겼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특히 D는 여행 전부터 100달러 정도를 한 번 딱 걸어 운을 시험해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카오에서는 성공했었고, 마닐라에선 실패했었다. 이번엔 어떨까? 100달러를 걸어 100달러를 벌면 바로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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