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나 웨스트 호텔 앞에 커다란 식료품 마트가 하나 있다. 이름도 푸드 팬트리(식품 저장실). 너무 솔직하게 자아를 드러내는 이름이다.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고 마트 뒤편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한 남자가 지게차에 오른다. 주차장 곳곳에 쌓인 커다란 박스가 그의 일거리다. 시동을 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스스럼없이 웃어 보였다. "일본 사람이에요?" "아뇨, 한국 사람인데요." "그래요? 여긴 한국 사람도 참 많아요." 그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았다. 기다란 손잡이를 움직이자 곤충의 집게 같은 쇳덩이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가 재미있는 거 하나 보여 드릴게요." 능숙하게 박스 밑으로 받침을 집어넣은 남자는 푸드 팬트리 건물 가까이 차를 댔다. 그런데 일 층엔 벽뿐이었다. 재고를 집어넣을 ..
1. 새벽에 눈이 떠졌다. 창밖으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런던 근교의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젯밤 런던에 도착한 후 호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잠이 들었다. 선잠이 들지도 않았고 비행으로 말미암은 피로도 없었다. 이럴 땐 시차 적응이 빠른 체질에 참 감사하게 된다. 어울리지 않게 새벽 공기가 마시고 싶어졌다. 미로처럼 길고 복잡하며, 가끔 오븐 타이머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호텔 정문 앞엔 벌써 먹이를 잡아 온 새들이 식전 기도를 지저귀고 있었다. 기온이 낮지는 않은데 바람이 불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런던의 스산한 추위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 새벽부터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차들을 본다. 출근길인가 싶어 이네도 참 빡빡하게 사는구나 하는..
3. 섬과 리조트 저도 모르게 낡고 부식된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팔라우의 유일한 포장도로를 따라 걸을 때 고향에 온 듯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시내라고 해도 번잡함이 없고 유명 상표라고는 맥주나 음료수 몇 종류 밖에 눈에 띄질 않는 곳. 도로 안쪽으로 멀뚱멀뚱 앉아있는 건물들 역시 현대 건축의 매끈하고 세련된 손길에 전혀 혜택 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다. 주물로 통째 짜 놓은 게 아닌가 싶은 콘크리트 건물과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생생한 베니어판, 그리고 한국 기와의 곡선미를 어설프게 대량생산한 느낌을 주는 슬레이트가 한 집마다, 멀어도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반복됐다. 이곳의 시간은 거의 멈춰버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리게 노를 젓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팔라우가 가장 비현실적으로 변하..
[여행과 에세이] 2011 유럽 여행기 (0) - 주마간산(走馬看山) 보러가기 1.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똑같은 골목, 똑같은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댔을 때 울리는 똑같은 인사말도 기나긴 여정의 시작일 땐 평소보다 특별하게 느껴진다. 묵직한 캐리어와 손때 묻은 여행책자는 신문이나 휴대전화에 몰두해 있는 옆 사람과 전혀 다른 운명을 예고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 도시, 이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이 자기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희망과 기대가 빚어낸 이런 묘한 감정은 어느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비추는 햇살을 볼 때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순간 말이다. 갑자기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머리를 아프..
갑자기 8일 정도 유럽을 가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십중팔구는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유럽 출장이 출발 닷새 전에 결정이 되면 본인이야 당황스러워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선 저 친구 제대로 운이 좋구만,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유럽이지 않냐며 격려하는 반응도 상당하다.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가 25개국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다시 그만큼이나 더 존재하는데, 어느 나라를 가느냐와는 상관없이 그저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돼서 좋겠다는 건 그 땅에 대한 지나친 동경인지도 모른다. 하긴 멀기도 멀고, 비행기 삯도 비싼데다가, 세계사를 배우는 순간부터 의식 속에서 서양 역사와 문화의 나침반은 그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니 당연한 일일까. 이렇게 말하..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 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 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에..
1. 기대 휑한 들판과 활주로 같은 도로엔 겨울 색이 완연했다. 추위로 기록을 경신하는데 재미가 붙은 계절은 그나마 열차 안에선 유예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정거장에 멈춰 한쪽 문이 일제히 열릴 때면 잊지 말라는 듯 가혹한 바람이 실내를 두드렸다. 그 심보엔 문신이 새겨진 근육을 뽐내는 사나이처럼 남세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번 여행지가 여기와는 180도 다른 계절이 지배하는 장소라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추운 나머지 크리스마스의 독특한 분위기조차 얼어붙지 않았던가. 덕분에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성탄절은 벌써 희미한 축제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흰 눈을 덮고 길게 길게 눕는 들을 보고 있자 오늘에서야 경건한 축일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여행 자체보단 다른 데 기대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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