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찍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는 한다. 멋진 풍경 사진은 그만한 장비를 갖추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나에게 남은 건 그냥 스쳐 가기 일쑤인 장면뿐이다. 스냅 사진의 가치는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의 그 장면과 그 사람을 포착할 행운은 그 순간에 있던 사람만 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스냅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다른 시선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선이 한 장의 사진에 특색을 부여하여 완성한다. 이때, 사진은 만들어가는 무엇이 아니다. 주어지는 무엇이다. 여행 중에는 깊든 얕든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때로 그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새에 렌즈 앞에 나타나 웃거나 손을 흔들거..
모든 것이 놀랍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그건 두려움이기도 했다. 의지해야만 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고 그것들을 헤쳐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호기심은 망망대해처럼 고갈되지 않는 무엇은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터를 잡고 메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채워지고 줄어드는 희소 자원에 가까웠다. 아니, 차라리 호기심을 느끼는 대상이 몇 가지로 집중되었다 말하고 싶다. 나는 수원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우물 몇 개를 파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그마저도 서툰 솜씨였지만, 지층이 바뀔 때마다 놀랍고 두려운 순간이 있었기에 견딜 만은 했다. 다만 의지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맞잡은 손은 그때만큼 어지럽게 얽혀있지 않다. 샘 솟을 기약 없는 구덩이 안을 들여볼 때마다 이 속으로는 혼자서 들어갈 도리 외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한때 자전거가 몹시 갖고 싶었다. 겨울의 징조는 채 열 번도 타기도 전에 주차된 그대로 눈이며 비며 찬바람이며 다 두들겨 맞을 자전거를 상상하게 했다. 그래서 몇 번을 망설이고 몇 번을 접었다. 결국 자전거는 사지 못했다. 따뜻한 날이 오면 그때 사도 늦지 않다고, 그러니까 봄의 징조를 기다려 보자고 자신을 설득했다.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에 대한 희구로부터 여행은 비롯되는가 보다. 시작은 보잘것없는 거리, 예컨대 이런저런 술을 파는 대형 마트나 도시를 흐르는 냇가에 자리 잡은 한가로운 카페 따위로부터였다. 바구니에 장거리를 담아 달리면 그 바람이 날 멀리 데려가 줄 것만 같았다. 최소한 기분은 그럴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자전거가 아주 많이 다니는 도시가 뭉게뭉게 떠올랐고, 그 유유한 속도를 지켜보면 ..
영하의 기온까진 아니었지만,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가슴에서 뭔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틀어막았다. 눈으로 채우고 싶어도 밤하늘은 미련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맑고 창백한 바람만 어둠 너머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 마음 안에 것들이 밖으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는지도 몰랐다. 겨울이 되면 마음이 허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날이 이 모양이니 거리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모두가 이 이상 초라해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인적이 드물어 더 추운 것 같고, 추워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줄어들고. 해가 뜰 때까지는 악순환이었다. 오히려 길가에 서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사람보다 흔했다. 낡고 두툼한 정장 차림의 택시 운전사들은 하염없..
다누키코지 5초메 옆에 있는 카페 랑방(カフェ ランバン)은 웹서핑 중 발견한 곳이다. ‘삿포로 카페’라는 아주 원초적인 검색어로 찾아낸 게 용할 정도로 사진만으로도 꼭 한 번 가봐야겠다 싶었던 카페다. 이는 거리를 걷다가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곳을 우연히 발견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카페 앞에 섰을 때, 황망히 지나치려다 다시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을 당위 비슷한 걸 읽어냈으니까. 삿포로 TV 탑에서 다누키코지까지 걸어오면서 몸이 많이 지쳤다. 여행 가방과 함께 챙긴 숙취는 그럭저럭 해소됐지만, 잠은 여전히 부족했다. 홍콩이나 마닐라 같은 곳에선 어떻게 새벽까지 놀았던 걸까. 역시 내 몸속 기관은 알코올이 들어가야 피로를 잊고 작동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엔 같이 마실 사람이 없으..
내가 쓰는 디지털 카메라에 필름 카메라 단렌즈를 붙여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 화각은 뭔가 부족하다. 표준 화각 이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미 그런 렌즈가 있다. 그것도 세 알씩이나. 뷰파인더가 없기 때문에 수동 초점 맞추기가 쉽지 않겠지만, 어차피 본연의 자동 초점 기능도 시원찮으니 그 밥에 그 나물이겠거니 했다. 삿포로에 가서 뭘 보고 어딜 가야겠다는 공부도 제쳐놓고 인터넷 검색질을 했다. 과연 쓸 만하면서 가격도 만만한 렌즈 컨버터가 있었다. 삿포로의 양대 전자상가인 빅 카메라와 요도바시 카메라 중 후자 쪽이 세일 중이라 저렴하다는 정보까지 확보했다. 좋아, 이거다. 그래도 일본 여행인데 카메라 용품 하나 정도는 사야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오래된 렌즈를 캐리어에 던져 넣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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