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밤이 되자 호텔은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방을 나섰을 때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복도는 잠잠했다. 해변이나 중심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이라 호텔 주변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림 같은 소음이 오히려 적막감을 더했다. 나는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그걸 눈으로 보고 기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육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와 낯선 이가 서로가 있던 공간을 교환했다. 밤의 호텔에 친근한 미소와 낭랑한 인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눈인사만 주고받는다. 소리를 내지 않아 서로의 밤을 방해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그를 태우..
우리가 살고 사랑하고 우리 스스로를 성화(聖化)하기 위한 이 세계는 존재에 관한 가치 중립적인 이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자연 현상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 세계는 얼굴이라고 하는 이타성(利他性)의 중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바라볼 얼굴, 존중할 얼굴, 어루만질 얼굴들이 존재하기에 우리 세계도 존재한다. - 이탈로 만치니, '얼굴들이 돌아오게 하소서' 中
:: 휴일 낮의 센트럴과 월요일 저녁의 센트럴은 확연히 달랐다. 지금껏 별로 본 적 없는 정장 차림의 남녀가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문득 홍콩을 묘사하는 많은 표현 중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가 떠올랐다. 금융업이 발달한 도시는 왜 삶의 속도까지 빨라져야 하는 걸까? 오직 숫자로만 존재하는 실체 없는 이상을 잡기 위해 쉼 없이 뜀박질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 이 도시가 그나마 진취적으로 발을 구르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저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박하게 사는 한국은 얼마나 처참한 곳인 걸까? 아니다, 분위기를 바꾸자. 오늘은 밤을 새워 기념해도 부족할 여행의 마지막 날이니까.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홍콩 남자의 헤어 스타일을 두고 흉을 본 적이 있지만, 그들은 실로 정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이른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네 시 반에 눈을 떴다. 하늘이 아직 짙은 남색을 게워내지 못한 시각이었다. 헐레벌떡 준비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오자 지나치게 부산을 떤 탓인지 갑자기 힘이 쭉 빠지고 울적해졌다. 마우이 섬이나 빅 아일랜드로 떠나는 낯선 이들과 함께 15인승 밴에 구겨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람이 이런 기분일 거란 생각이 들자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워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막연한 기피는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여행 당일 아침에 찾아온다. 이런 곤혹스런 증후군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할 수 있는 만큼 빨리 터미널에 들어가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2층짜리 낡은 건물이 길게 이어진 호놀룰루..
8번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적당한 에어컨 바람 덕에 기분이 좋았고, 하차하고 싶을 때 잡아당기면 되는 줄을 보며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손잡이를 당기면 버스 위에 달린 굴뚝에서 나팔 소리와 함께 뽀얀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자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라도 벨을 울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충동을 이겨내고 책을 펼쳤을 땐 이미 버스 안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진작 자리를 차지한 나는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읽은 책이 오늘도 흥미로웠다. 이국적인 장소를 탐색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또 다른 이국적인 장소에서 읽고 있자 나 역시 먼 곳에 왔다는 현실감이 선명해졌다.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여행을, 정서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진행 중이었다. 그래..
옷에는 문명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부와 권력을 뽐내기 위해 사람은 옷을 입었다. 의복이 필수품에서 사치품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던 인간이 자아실현과 명성, 지위에 대해 고민하게 된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다. 극한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죽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사람은 없다. 죽음만큼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사망 선고를 피하기 위해 입을 뿐이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옷은 우리를 한정 짓는다. 이것은 얼마나 제 몸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는지, 얼마나 개성 있고 세련된 옷을 입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에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나를 일관성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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