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부터의 피로인지도 모른 채 그냥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날을 거듭할수록 늘어가는 욕심과 날이 거듭되어도 변할 줄 모르는 두려움이 공모하여 빚은 피로일 것이다. 나무 그늘에 몇 시간씩 누워있는 오후를 상상한다. 책을 읽다가, 무거운 눈꺼풀 아래 쓰인 꿈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 분명 읽긴 했을 텐데 생소하기만 한 문장을 다시 읽어도 좋겠다. 실수로 한 곡 반복을 하는 바람에 한 시간 내내 같은 곡을 들어 놓고선 눈을 뜨자마자 앨범이 한 바퀴 돌았구나 착각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잔뜩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달려온 바람이 나한테 걸려 넘어지길 기다린다. 그러면 길고 뾰족한 잎이 몸을 흔들며 그늘의 가장자리를 흩트린다. 사라락 옷깃 스치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이파리와 이파리..
"술을 홀짝이며 생각할 시간을 가져. 내가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6층에서 맞는 바람은 엄청났다. 호텔 사이로 달려드는 바람, 운하를 스쳐 바다로 불어가는 바람, 정신없이 건물을 오르내리는 바람. 폐쇄된 수영장을 따라 건물 한 바퀴를 돌면서 머리카락이 멋대로 춤을 추는 느낌을 즐겼다. 이대로 날아오른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매일 밤 난 너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해." 밤은 화려하지 않았다. 호텔방마다, 을씨년스러운 주차장마다, 건물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간간이 소음이 들려오는 거리마다 백열등 몇 개가 섬처럼 반짝일 뿐이었다. 커튼이 쳐진 건너편 호텔 창문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은 뭘 먹었을까? 창밖을 보며 마시고 있는 술은 맥주일까 ..
처음엔 평범한 갤러리인 줄 알고 걸음을 멈췄다. 하와이 미술계의 동향을 파악할 만한 감식안이나 취향은 없지만, 그냥 한번 기웃거려 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오며 가며 보았던 하와이의 그림은 자연이나 원주민을 주제로 한 강렬한 색채의 작품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실내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업실과 전시장을 겸하는 공간인가 했더니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공동 작업인가? 그런데 정작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아기 기저귀를 가는 부모처럼 어색해하고 당혹스러워하는 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캔버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붓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작업실이자 전시장이며 동시에 미술 학원이었던 ..
72번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오하우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마카푸우 포인트가 나온다. 오하우의 모든 곳을 가보진 못했으니 그 말이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확 트인 전망을 보면 굳이 반대할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겠다 싶다. 오하우 섬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나와 대동소이할 다른 사람들도 마카푸우 포인트에 거는 기대가 컸다. 최소한 렌즈를 꽉 채울 멋진 풍경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비가 왔다.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연청색에서 남청색으로 바뀌는 바다는 먹구름이 끼기 전 딱 몇 분 동안만 제 빛깔을 보여주었다. 그 명암과 채도와 색조는 사람의 힘으론 재현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면 조용히 사라질 정도로 겸손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
옷에는 문명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부와 권력을 뽐내기 위해 사람은 옷을 입었다. 의복이 필수품에서 사치품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던 인간이 자아실현과 명성, 지위에 대해 고민하게 된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다. 극한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죽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 사람은 없다. 죽음만큼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사망 선고를 피하기 위해 입을 뿐이다. 다양한 디자인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옷은 우리를 한정 짓는다. 이것은 얼마나 제 몸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는지, 얼마나 개성 있고 세련된 옷을 입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에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나를 일관성 있게..
1.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는, 때로는 그것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되기도 하는데, 책이나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소에 실제로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로맨스나 자극을 받은 누군가의 경험담, 한 번 스쳤을 뿐인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먼 곳으로 이동하게 한다. ‘비포 선셋’의 만남을 떠올리며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방문하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선 데보라 카를 기다리던 캐리 그랜트의 모습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세대가 다른 나는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을 찾게 되겠지만).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발상지와 경전 속 일화가 벌어..
하와이 여행기라면, 최소한 하와이 가이드북이 소개하는 몇 군데 정도는 언급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는 사실 증명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두 시간 동안 오하우의 명소 세 군데를 돌아보고 남은 건 메모 열 줄과 사진 몇 장뿐이었다. 그럼에도 물 먹인 소처럼 부풀려 스케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나 자신에게 그곳들을 잊지 말라고 환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나 감상을 끄집어내긴 어렵지만 가끔 남국의 정서를 되살리고 싶을 때 꺼내보기 좋은 기억으로서 말이다. 햇살은 아침나절부터 강렬했다. 가이드는 일정이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마음이라도 가다듬으라는 듯, 해안 도로에서 툭 튀어나온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를 감상할 시간을 줬다. 선글라스를 준..
만약 당신에게 많은 돈이 있다면 이런 곳에서 사는 건 어떨까? 오하우 섬 일주는 호놀룰루에서부터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섬을 도는 투어다. 가이드는 15인승 밴의 가속 페달을 밟으며 처음이니까 흥미로운 곳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하와이 카이. 섬 남동쪽에 위치한 부촌으로 하와이의 비버리 힐즈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이 그에게 흥미로운 곳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지기 전, 호놀룰루 시내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하게 닦인 도로로 접어들었다. 금과 옥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휘황찬란한 궁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저택이라 불러줘야 예의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단독 주택들이 이어졌다. 하와이에서도 알아주는 부자들이 모인 하와이 카이 커뮤니티에 참여하려면 못해도 270만 달러 이상의 집을 사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여행을 갈 때마다 노트를 쓴다. 일정에 따라 얇은 공책 반 권이 되기도 하고, 한 권을 다 쓰고도 모자라 중간중간 여백을 찾아다녀야 하기도 한다. 보통 공항철도에서부터 쓰기 시작해 귀국편 비행기 안에서 마무리를 짓는데, 한 번도 정의 내려 본 적은 없지만 내심 여행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하던 지점과 대체로 일치하지 않을까 한다. 여행을 떠난다는 실감이 날 때 그 기분을 노트의 첫 문장으로 옮긴다. 현실에 착륙하기 직전엔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며 안전 벨트를 조인다. 펄럭펄럭 페이지를 오가면서 여행을 펼치고 덮는다. 가방을 열어보자.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거나 안전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제외하면 여행자에게 남는 필수품은 카메라가 될 것이다. 사진은 수많은 풍경과 상황,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기억하는 ..
호놀룰루 칼라카우아 거리에서 녹색 대문 하나를 봤다. 크고 투박한 글씨체로 '인터내셔널 마켓 플레이스'라 쓰여있는 간판 밑에 서자 이 골목 안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빽빽하게 들어선 노점상으로 미루어 보아 토산품을 파는 재래시장 같긴 한데, 누가 재래시장에 인터내셔널이란 수식어를 붙인단 말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같은 근거 없는 명제를 추출해낸 사고방식이 여기에도 적용됐단 말인가? 야시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좁은 골목, 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사위가 잠잠해졌다. 시장 입구는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이 한 데 모여 혼잡스럽기까지 했는데, 여기엔 돌아다니는 행인조차 거의 없었다. 조명도 어두침침해서 건물과 골목 사이엔 회색 여백이 팽배했고 화려한 색상의 ..
- Total
- Today
- Yesterday
- 베짱이세실의 도서관
- To see more of the world
- 데일리 로지나 ♬ Daily Rosinha
- :: Back to the Mac
- Be a reader to be a leader!
- 좀좀이의 여행
- Jimiq :: Photography : Exhibit…
- 반짝반짝 빛나는 나레스★★
- 일상이 말을 걸다...
- S E A N J K
- Mimeo
- Imaginary part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전자책 이야기
- Sophisticated choice
- 토닥씨의 런던일기
- 언제나 방콕라이프처럼
- PaRfum DéliCat
- The Atelier of Biaan
- JUNGSEUNGMIN
- 꿈꾸는 아이
- hohoho~
- Write Bossanova,
- Connecting my passion and miss…
- Eun,LEE
- 밀란 쿤데라 아카이브
- 순간을 믿어요
- Margareta
- 유럽
- 이태리
- 22mm
- 이탈리아
- 홋카이도
- 홍콩
- EOS M
- 사운드트랙
- 필름카메라
- 50mm
- Canon a-1
- 캐논
- 한주의기록
- a-1
- 미니룩스
- 트레블노트
- 파리
- 라이카
- 일본
- 트래블노트
- 수필
- 하와이
- 사진
- Portra 160
- 음악
- 주기
- 책
- 24mm
- 여행
- 북해도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