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젤리제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도중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거리지만, 내가 만약 이 거리라면 나에게서 이물감을 느낄 것 같았다. 이물감은 예상치 못한 존재에 대한 거부반응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거부반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척 피곤한 상태였고, 날씨는 너무 추웠다. 맑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 빛깔만큼 서늘했다. 내가 본 파리의 야경 중 개선문 전망대에서 봤던 야경이 가장 인상 깊었다. 헥헥거리며 나선 계단을 올라 싸늘한 옥상에 섰을 때, 그때부터 나는 파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막 그치고 시내 전체에 뿌연 안개가 꼈던 밤이었다. 에펠탑 이 층 전망대 높이까지 구름이 내려온 그런 시 ..
어쩌면 이번 우리 일정 중 가장 글로 옮기기 힘든 시간이 아닐까 한다. 토요일 밤, 란콰이퐁에서의 축제. 그저 맥주와 칵테일에 취해 춤추고 놀았을 따름인데 거기에 코멘트 붙일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세를 고쳐잡는다. 사라진 징검다리처럼 밤 시간을 뛰어넘을 순 없지 않겠느냐고. 여행 둘째 날 밤의 우리 일정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완차이 어느 골목길에서 아주 싸고 맛있는 초밥집을 발견한 우리는 저녁으로 초밥을 먹었다. 그리고 진 토닉을 한 잔 만들어 마신 후, 곧바로 침사추이의 너츠포드 테라스로 향했다. 저번 여행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올 나잇 롱'이란 바에 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 흥이 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스테이지에서 볼룸댄스를 추고 계셨는데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즐거웠지만..
해는 뜨지 않았지만, 더위도 같이 숨은 건 아니었다. 종종 약한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며 습도는 한계치를 향해 내달렸다. 바다는 불쾌지수를 배출할 거대한 해방구였으나 무지막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진 못했다. 해풍, 해풍만 우리를 조금 위로해 주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게 제일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소금기에 바랜듯한 건물 외벽의 색을 보고 있으면 그 모든 여름이 갑자기 감당 가능한 장애처럼 느껴졌다. 집과 사무실과 카페와 대중교통에서 지금껏 너무 습관적으로 "더워 죽겠다."라고 투덜거려오지 않았던가. 그건 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피상적인 대화를 메우기 위한 공용 비밀번호였다. 습관적인 인사, 누구나 알고 있어서 유출할 필요조차 없는 패스워드. 우리는 더위에 공감함으로써 우리에게 필..
둘째 날, 우리는 갈 곳을 정해두고 움직이기로 했다. 어디로 갈지 정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탠리로 가자! 그게 다였다. 결정은 삼 분도 안 돼서 끝났다. 대신 첫 번째 여행처럼 비싼 빅버스를 타지 말고 일반 버스를 타자는 데 중지가 모여졌다. 그게 훨씬 싸고, 좀 더 빠르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수도 없이 트램을 지나쳤는데 왜 이건 타지 않았을까. 창문이 다 열려있어 더워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미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노선을 알아봐 둔 우리는 느즈막이 일어나 타임 스퀘어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어제 완차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타임 스퀘어 바로 앞 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스탠리 행 버스 정류장을 향해서였다. 우리가 머무는 코스모 호텔 바로 옆에 터널이 하나 있는데 빅버스처럼 그..
사람에 치이고 건물에 깔보이며 꽤 오랜 시간을 코즈웨이 베이 근방에서 보냈다. 그래도 견딜 만은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실로 여름의 홍콩은 사람을 몹시 지치게 만드는 괴력을 갖고 있었다. 온도와 습도가 동시에 높은 것은 물론, 에어컨 실외기와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열기까지 더해져 힘들다는 인식 이전에 몸이 나자빠질 정도였다. 그러나 나와 D는 꾸역꾸역 걸었다. 우리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 바다 한가운데로 걸어나가려는 사람,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물론 거리의 인파도 피로에 한몫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름도 모르는 타자의 홍수에 휩쓸려 허우적거릴 수 있음이 이 도시의 매력이자 피로 요인이라는 게 말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인..
척후병처럼 주변 정탐을 마친 우리는 전리품으로 얼음을 사가지고 왔다. 한낮의 축배를 위해서였다. 짐을 마저 풀고 음료수로 드라이 진을 한 잔 마신 다음 호텔의 공중정원에 가 보았다.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되지 않지만, 로비와 공중정원에선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심 속 테라스는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붙은 황금색 안내판에서 읽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장소였다. 커피 머신이 준비되어 있고, 매일 메뉴가 바뀌는 과일 바구니도 있었다. 나나 D 같은 사람들에겐 수분과 무기질, 비타민 따위가 절실하다는 충고를 에둘러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작 나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몇 개 집어 먹지 않았지만 말이다. 누구든 편하게 와서 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돌아가곤 했다.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 담배를 피우..
나와 D가 홍콩에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숙소 주변의 편의점을 찾는 것이다. 마트가 싸서 좋긴 하지만, 조금 위험하다. 한밤중엔 열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음료수나 얼음, 간식거리가 필요할지 모르는 게 우리의 여행이다. 하긴 쇼핑센터에 입점한 곳을 제외하면 홍콩에서 마트를 본 적도 별로 없다. 편의점을 찾는 산책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이 세 번째라 적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긴 했지만, 의례적으로 행하는 의식이라고나 할까. 지독한 여름 날씨를 몸으로 받아낼 각오가 절로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행자는 걸어야 한다. 여행은 도보에서 시작하고, 도보로 맺음 해야 한다. 시속 4.5km는 생각의 속도와 알맞은 보조를 이룬다. 홍콩섬과 주룽반도의 풍경은 확실히 달랐다. 그나마..
인천 공항에서 홍콩의 첵랍콕 공항까지 가는 네 시간 좀 안 되는 시간은 장거리 비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그럭저럭 견딜 만한 고통을 줄 것이다. 나로서는 이 네 시간이 좀 어중간하다. 영화를 한 편 보면 딱 좋겠지만, 저가 노선엔 공용 스크린도 없다. 모바일 기기로 영화를 보는 데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도착하는 순간 들여다도 안 볼 영상물을 넣어 오는 게 귀찮기도 하다. 책을 읽자니 온갖 기대와 흥분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 책 역시 도착하면 표지 쓰다듬는 일조차 없을 게 뻔하고 말이다. 여행 노트를 써 볼까? 이제 막 시작한 여행인데 쓸 말이 있을 턱 없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잠을 청해 본다. 그러나 기내가 환해서 오래 잠들 수가 없다. 거참 애매하고 또 애매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빈자리를 ..
벌써 꽤 오래 전 일이 되어버린 2013년 7월의 홍콩 여행. 한창 두 번째 홍콩 여행기를 쓸 때였기도 했고, 파리에 북규슈까지 겹쳐서 이건 포스팅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올해 건 올해 다 정리해 버리는 게 깔끔한 법. 길고 긴 여행기로 쓸 게 아니니까 사진이라도 들추어 보자. 비가 오는 7월이었다. 9월에 갔을 때도 아주 더웠던 기억 때문에 사실 날짜를 정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나서도 많이 망설였었다. 도대체 7월엔 홍콩이 얼마나 더울까? 한국엔 비가 왔었다. 그리고 지독한 더위가 아직 마수를 뻗치기 전이었다고 기억한다. 결국 제대로 각오하고 더위를 즐기자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숙취 때문에 엄청 고생했던 두 번째 홍콩 여행의 아픈 추억을 되새김질 하며 전날에 술 한 모금..
미리 이야기하자면, 베르사유 궁전 안에 들어가진 않았다. 두 해 전에 갔던 그곳은 내부도 정원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거울의 방은 얼마나 화려했던가. 정원은 또 얼마나 숲처럼 시야 끝까지 내달렸던가. 그러나 그걸 기억하면서도 다시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저 밖에서, 카페 같은 데라도 앉아 있고 싶었다. 하늘이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서. 그냥 남들한테서 날 좀 떨어뜨려 놓고 싶어서. 좀 더 정확한 이유를 대자면 여기까지 오다가 보았던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두 젊은 여자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아마 베르사유 대학에 다니는 듯,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자는 돌길을 따라 내려가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어떤 모퉁이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껏 이 자리에서 수없이 오갔으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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