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진 않았다. 새벽은 말근 쌀뜰물처럼 뽀얗게 빛났고 단 한 번 뿐인 여명을 저버리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 후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키보드를 펼쳤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D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어쩌면 이땐 거의 체념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노트를 많이 정리하진 못했다. 좀 더 아침이 묽어졌다. 샤워를 하고 짐을 싼 다음 일어날 시간이라며 D를 깨웠다. 서호에서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체크인 카운터는 열리지 않았지만 한국말을 쓰는 동향의 얼굴이 자주 보였다. 배가 고팠다. 남은 돈이 15만 5천 동이었는데 쌀국수 두 그릇에 생수 한 병을 사자 딱 맞아떨어졌다. 1천 동 하나까지 털어냈다. 직원은..
28일 간의 기록. 28일 동안 기차와 배에서 잔 날을 포함해 모두 열다섯 군데의 숙소에서 묵었다. 가장 많이 숙소를 옮긴 곳은 라오스의 방비엥이었다. 우리는 끝없이 이동했다. 택시, 툭툭이, 송태우, 시내버스, 미니밴, VIP 버스, 열차, 자전거, 오토바이, 슬로우 보트, 스피드 보트, 크루즈, 카약, 비행기 등을 탔으며, 무엇보다 두 다리가 최고의 이동수단이었다. 현금으로 가져 간 1,280달러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ATM기는 두 번 이용했는데 한 번은 재미삼아 해봤고 한 번은 당장 쓸 돈이 없어서 해봤다. 현지에서 카드로 계산한 비용 중 가장 비쌌던 건 2박 3일 하롱베이 크루즈 투어였다. 그리고 단시간에 최고 비용을 쓴 건은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가는 베트남 항공이었다. 우리는 한 시간만..
호안끼엠 호의 북쪽, 구시가지를 향해 가는 길은 아주 북적였다. 현지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가 즐비하고 주차된 오토바이가 인도를 점령하고 앞서 나가려고 애쓰는 달리는 오토바이는 차도를 점령했다. 하노이에서 안전하게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걷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오토바이를 무시해야 한다. 그들이 알아서 나를 비켜가 주니까. 종종 경적을 울리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 역시 무시하면 그만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몰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류는 정장을 입고 타는 이들이다. 오토바이와 정장은 얼마나 부조화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잘 어울리는지. 두 발 전동차를 타고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남자들은 넥타이를 휘날리고 여자들은 다리를 꼭 붙여 치마가 뒤집어지지 않게 애쓴다. 여..
어제 술을 꽤 마셨음에도 푹 자서 그런지 숙취가 없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침대에 누워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할 힘을 내려고 애쓰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든 말든 오늘이 마지막 날이든 말든 나는 꾸물거리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가고 싶지 않거나 하지는 않다. 단지 또 떠나고 싶을 뿐이다. 28일이 이렇게 흘렀으니 다음엔 또 다른 28일을, 내키면 280일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술자리에서 D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곧 결혼을 하는 그로서는 다시 이런 긴 여행을 떠나기가 어려울 거라고. 내 코가 석자인데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직전이니 오히려 축하할 일이다. 새로운 삶은 여행, 그 이상일 것이다. (사실 이 말..
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고 온 마지막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 예약자인 내 이름이 쓰인 웰컴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그걸 보자 정말 여행의 끝에 도달했다는 실감이 났다. 사진을 찍은 후 무료로 제공되는 바나나와 초록색 귤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부드럽고 과육이 실한 동남아시아의 과일들. 너희도 일단 안녕이구나. 우리가 잡은 호텔은 서호 주변에 위치했다. 굳이 이 호텔을 잡은 이유는 카지노였다.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재미있게 즐겼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특히 D는 여행 전부터 100달러 정도를 한 번 딱 걸어 운을 시험해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카오에서는 성공했었고, 마닐라에선 실패했었다. 이번엔 어떨까? 100달러를 걸어 100달러를 벌면 바로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그래..
하노이 상인들이 여행자를 (악의 없이) 등쳐먹는 법은 여러가지다. 우선 택시가 있다. 하노이에 도착한 날, 우리는 열 시가 넘어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사는 미터기를폼으로 켜놓고는 시내까지 가는데 75만 동을 요구했다. 대체로 예약제로 이용하면 40만 동이 넘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랴. 이미 출발해서 그런 말을 했는데. 웃긴 건 하노이 공항을 나서자마자 경찰의 검문에 걸렸는데 운전자를 포함해 뒷좌석에 앉은 우리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모두 50만 동의 벌금을 맞았다고 한다. 그는 그걸 가지고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고소하다는 생각을 물론 했었다.) 우리를 구시가지에 내려놓고 잔돈을 조금만 주는 것이다. 벌금을 물었으니 좀 도와달라고. 여기서 D가 강력하게 제지하며 "그건 네 잘못이..
책을 읽으면 그것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다 읽은 날짜를 적어두곤 한다. 한해의 마지막 즈음에 목록을 훑어보면 그해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던 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떠오른다. 책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일은 즐겁다. 몇 개월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줄창 읽었던 시기는 당시 내가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작가들은 나를 철저하게 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정신에 세게 몇 대 얻어맞으면서도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주제 사라마구, 알랭 드 보통,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연수,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밀란 쿤데라. 물론 여기에 다 적지 못한 다른 작가와 시인, 여행가들도 모두. 그..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은 달콤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방을 복제하는 커다란 집에 모여 어울렸고, 매일 밤 새로운 손님을 맞아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희망자들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그곳에는 꿈 밖에서 알던 사람, 꿈속에서 알던 사람들이 전부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이나 사실 생면부지가 아닌 이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누군가는 방 하나를 꽉 채운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표정도 가물가물하지만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끝없이 생성되는 방 안에 가득했다. 흥미진진해 죽겠는데 페이지가 한참 남아 든든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술을 마셨다. 꿈에서 깰 시간이 되어도 이곳이 ..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찍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는 한다. 멋진 풍경 사진은 그만한 장비를 갖추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나에게 남은 건 그냥 스쳐 가기 일쑤인 장면뿐이다. 스냅 사진의 가치는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의 그 장면과 그 사람을 포착할 행운은 그 순간에 있던 사람만 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스냅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다른 시선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선이 한 장의 사진에 특색을 부여하여 완성한다. 이때, 사진은 만들어가는 무엇이 아니다. 주어지는 무엇이다. 여행 중에는 깊든 얕든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때로 그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새에 렌즈 앞에 나타나 웃거나 손을 흔들거..
내겐 관람차를 탔던 기억이 없다. 한번은 올라봤을 법도 한데 너무 어렸을 때라 지워진 건지도 모른다. 그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시야가 점점 넓어지다 절정에 오르면 어떤 기분이 벅차오르는지 나는 모른다. 조심스레 지금에 와선 덤덤할 게 분명하리라 예측할 뿐이다. 이것이 한계라면 한계라 불러도 좋다. 감정을 움직이는 동력의 가짓수가 줄어드는 나이가 됐음은 분명하다. 굳은살처럼 덕지덕지 붙은 껍질은 마음의 바퀴를 뻑뻑하게 하고, 톱니가 맞물리지 않고 자꾸 엇나가게 한다.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고 일에 열중해도 그걸 다 긁어낼 도리가 없다. 그러기엔 더께가 쌓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때마다 대청소를 하듯 아예 떠나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관람차에 오르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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