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에 관하여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한국은 폭설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가을 날씨인데 말이다. 며칠 떠나있지도 않았건만 미친 듯이 춥고 마구 눈이 내리던 서울 풍경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게 72시간 전까지 현실이었고, 8시간 후부터 다시 현실이 될 그림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꿈을 꾸자. 몇 달 전에 떠나보낸 가을과 일단 재회하고 보자. 마지막 날이랍시고 그나마 일찍 일어나지 않았나. 지금은 아침과 제일 흡사한 시간이 아니던가. 가방 정리를 하면서 나흘간 너저분해진 기억도 쓸어 모은다. 이번엔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좋지 않았을까. 무엇이 만족스러웠고 무엇이 아쉬웠을까. 여행 계획서를 허투루 썼으니까 여행 평가서라도 제대로 작성해 봐야겠다. 하지 ..
:: 세나도 광장으로 이번엔 제대로 중심부로 온 모양이다. 카지노를 나와 선착장으로 돌아온 후, 다시 마카오 윈 호텔 행 셔틀 버스를 타고 호텔촌에 도착했다. 주변엔 어느 하나 크고 화려하지 않은 건물이 없었다. 윈 호텔만 해도 건물 전체가 황금색 유리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당엔 넓은 분수대와 한쪽으로 기운 부채꼴 모양의 구조물이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크고 화려하지만, 동시에 모든 게 낡았다. 어디에서도 음악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거리는 음소거 버튼이 눌린 듯 조용했다. 눈 부신 네온사인도 침묵 속에서 깜빡였다. 모든 게 시시각각 움직였지만, 모든 게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각과 청각의 불균형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셋 모두 적응이 잘 안 되는 상태에서 마침 화..
:: 마카오로 가는 길 전날 너츠포드 테라스에서 격하게(?) 논 탓인지 오늘도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창문 없는 방은 아침이 왔다는 소식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어영부영 한낮이었다. 마카오를 갔다 오는 날인데 제대로 늑장을 부린 격이었다. 가장 먼저 일어나 분주하게 우릴 깨운 Y는 씻는 것도 일등이었다. 나와 D가 기상 후 갑작스레 덮쳐오는 체력의 한계에 정신을 못 차린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저 셋 다 처음 가보는 곳, 마카오로 간다는 기대 하나로 버텼다. 이번 여행에서 마카오 일정을 맡은 Y는 선별된 가이드로서 우리에게 커피도 내려주고 방도 정리하고 가방을 싸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이 녀석, 오늘 뭔가를 보여주긴 제대로 보여주려나 보구나. 나와 D는 기대를 안고 그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일으..
:: D의 사진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바깥은 완벽히 어두워져 있었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장어가 들어가 배는 든든하고, 이미 밤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시간에 대한 미련으로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여행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 중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휴지기 - 붕 뜬 기분에 사로잡혀 생각도 행동도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 - 가 찾아올 때가 있다. 여행이 언제나 신선하고 흥미로운 건 아니다. 나와 D는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몸으로 침사추이의 골목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뭘 할까? 어딜 갈까? Y를 다시 만나기까지 적어도 한 시간은 남았다. 외국의 도시에서 오랫동안 못 본 친구와 조우하고 있는 Y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친구의 여자친구와 친구 여자친구의 친구들에 둘러싸여서(모..
2012년 홍콩 여행기, '홍콩의 아침을 본 적이 없다'는 끝났지만,오랜만에 사진을 들춰보다 보니 여행기에 다 붙이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그래서 모아 보았다.(2013년 여행기는 언제 다 쓰누...) 비행은 언제나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다시 타고 싶은 타이 항공의 실내. 첵랍콕 공항 짐 찾는 곳에서 본 한 여인.이제 인간은 노트북을 들고 세계 어느 장소에서든 '일'을 하게 됐다.심지어 그건 즐거움이기까지 하다. 첫 날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에서 찍은 사진.여긴 아직 사진을 찍어 파는 사진사가 있었다.예전엔 서울에서도 공원이나 유원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이젠 여의도 공원에서 벚꽃 축제를 할 때나 이분들과의 재회가 가능하다. 인구 밀도 치명적으로 높은 곳, 몽콕.자동차 밀도도 치명적으로 높다.그러나 다..
걱정과는 다르게 놀라울 정도로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정상회담 때문에 차가 많이 막힐 거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상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오하우 섬에 있는 국제공항은 최초로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가 세웠다 해도 믿을 정도로 낡았다. 여행의 시작과 종착을 책임지는 역할엔 지장이 없지만, 딱히 볼거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공항은 터미널 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버라이어티하다. 에이프런에 서 있는 비행기는 또 어떤가. 거대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아한 곡선에 혼이 빠져 한참이고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불만이었던 이유는 출국 심사를 받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는데 흡연 구역이 하나도 없었..
하와이를 떠나는 날 아침. 공항에 갈 때까진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아침 산책을 나섰다. 아침 산책. 듣기만 해도 여유가 넘치고 평화로우며 그날 하루 전체를 의미 있어 보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무엇이든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마법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어렵다. 매일의 출근을 마법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듯이. 아침 산책이라는 걸 몇 번 해본 적도 없고, 그마저도 여행이나 가야 겨우 하곤 했던 나로서는 이 생소한 행위 자체가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장이오,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이 섬처럼 여유로운 사람이 되자. 하루라도 지속되면 다행인 그 수많은 다짐들. 거리는 벌써 관광객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이곳저곳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대했던 산책의 묘미는 대번에 쭈글..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았을 때,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그냥 그것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내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있을 땐 의미가 없지만, 모이면 ‘못다 한 이야기’라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된다. 불 꺼진 꽁초는 한 개비일 땐 쓰레기일 뿐이지만, 수북하게 쌓여있으면 그 어떤 곳이든 저 있는 곳을 재떨이로 만든다. 버려진 필터 조각들의 집합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들도 ‘불필요한 것들의 사전’이 있다면 저마다 목차 하나씩을 차지하고 그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할 테니, 과연 다수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나에게 남은 하와이 이야기, 정확히 말하면 아직 소개하지 못한 장소가 몇 된다. 오하우 섬에 있는 폴리네시안 문화센터, 돌 농장과 ..
해가 지고 밤이 되자 호텔은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방을 나섰을 때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복도는 잠잠했다. 해변이나 중심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이라 호텔 주변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림 같은 소음이 오히려 적막감을 더했다. 나는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그걸 눈으로 보고 기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육 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와 낯선 이가 서로가 있던 공간을 교환했다. 밤의 호텔에 친근한 미소와 낭랑한 인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눈인사만 주고받는다. 소리를 내지 않아 서로의 밤을 방해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그를 태우..
:: 빅버스 오, 빅버스여. 우리를 스탠리까지 태우고 달렸던 크고 날렵하며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리의 붉은 탕아여. 태양은 온화하고 바람은 열기에 차있지 아니하니 너의 활짝 열린 머리 위에 앉는 게 이보다 더 안락할 수 있을까. 오늘은 새로운 길로,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길로 우리를 인도할 테요, 과감히 딱딱한 객석에 몸을 파묻고 카메라를 높이 들어 원숭이처럼 환호하리라. 그러니까 오늘의 빅버스 코스는 홍콩섬 일주였고, 나와 D도 가본 적 없는 완차이와 코즈웨이 베이를 지나 마지막으로 빅토리아 피크 아래쪽을 보게 될 터였다.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내리자고 얘기했지만, 사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버스틀 타고 달리다 보면 관성에 의해 계속 가게 된다. 하나의 코스를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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