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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 아일랜드의 볼케이노 내셔널 파크 정상에 올랐다가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검은 땅을 달렸다. 좌우로 쫙 펼쳐진 흑색 사막이 파괴된 후의 세상을 연상케 했다. 여행안내서에선우주적인 풍경”, “달에 온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정도로 이질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젠간 벌어질 거대한 사건의 예고편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마그마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멀리 흘렀는지 빅 아일랜드는 간척사업을 하지 않아도 절로 영토를 늘려가는 곳이다. 1970년대 깔아 놓은 아스팔트 도로가 1983년 분출 때 묻혀 일부만 드러난 광경을 봤다. 딱딱하고 단단해 보이는 아스팔트가 이토록 쉽게 잘려나갈 수 있다니, 재난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경외감이었다.

  그런데 만물이 침묵한 것 같은 현무암 사이에서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인간이 언젠간 파국을 맞이할 거란 예감이 절로 드는 와중에도 세상이 영원히 죽은 땅으로 계속되지 않으리란 희망을 보았다. 비록 그 사실을 기념할 이성적인 존재는 모두 사라진 후겠지만, 자연은 말 그대로스스로 그러하듯존재를 계속할 것이다.

  용암이 만든 절벽에 파도가 친다.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어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하얀 물거품 사이로 침몰할 것이다. 어느새 지평선엔 무지개가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륙 곳곳엔세상의 끝이란 별명을 가진 지역이 산재해 있지만, 이곳만큼 그 무시무시한 의미와 어울리는 장소도 없겠다. 바람이 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이곳은 위험천만한 곳으로 변한다. 인간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아직도 살아있는 화산 심장의 입김을 보기 위해 다시 전망대에 오른다. 올라가는 길엔 비가 참 많이도 쏟아졌다. 그런데 지는 해는 구름 사이로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란 안개가 세상을 덮었다. 검은 현무암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비에 젖어 더욱 발광했다. 등 뒤로 멀어지는 용암 절벽이 세상의 끝이란 명찰을 달고 무대 위에 오르고 있었다.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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