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차 한 대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달려갔다. 누가 실려 가는 걸까,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상상해 보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고난도 기술을 시도하다가 발목을 부러뜨렸을까? 아니면 온몸의 90퍼센트에 3도 화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아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을까? 누군가 저 구급차를 보면서 그 안에 혹시 내가 타고 있나 궁금해하지는 않을까? 내가 아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알고 있는 장치가 있다면 어떨까? 환자의 장치가 아는 사람의 장치를 주위에서 탐지하지 못했다면 구급차가 거리를 달릴 때 지붕에 커다란 사인을 번쩍일 수도 있겠지. 걱정 말아요! 걱정 말아요! 그 장치가 아는 사람의 장치를 탐지해 낸다면, 구급차는 거기 탄 사람의 이름과 함께 이런 메시지를 번쩍이든가. 심각하지..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일요일에는 미사 시간 전에 외출할 수 없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실제로 프티트 마들렌을 맛보기 전 눈으로 보기만 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빵집 진열창에서 자주 보면서도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콩브레에서 보낸 나날과 멀리 떨어져 보다 최근 날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오랫동안 기억 밖으로 내던져진 추억들로부터 아무것도 살아남지 않아, 그 형태는 - 그리고 엄격하고도 경건한 주름 아래 그토록 풍만하고 관능적인 제과점의 작은 조가비 모양은 - 이제 파괴되고 잠이 들어 ..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무라카피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노르웨이의 숲저자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출판사민음사 | 2013-09-02 출간카테고리소설책소개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현...
우울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니나는 천천히 말했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니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네가 삶을 기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왜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그랬지. 니나는 대답했다. 우울은 인식의 시초일 뿐이야. 갑자기 니나는 웃었다. 무슨 현명한 말이라도 하는 것 같군. 물론 나는 기쁘게 살아. 그런데 이 세상에는 거짓 우울도 있는 법이야. 니나는 계속했다. 언니는 사람들의 눈을 보아야만 해. 많은 사람들에게 우울..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단지 이런저런 영상들이나 보려고 했어." 내가 말했다. "주유소, 노란 택시, 자동차 영화관, 광고판, 고속도로, 그레이하운드 버스, 국도에 있는 버스 정류장 표지판, 산타페 철도, 사막. 무미건조한 의식에 젖어 있던 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꼈지.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영상들에 싫증이 나서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게다가 이곳 사람들이 내게는 여전히 낯설어서 전처럼 행복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어졌어." "그렇지만 지금 이순간만큼은 행복하지 않아?" 클레어가 물어왔다. "행복해." 내가 대답했다. 순간 나는 다시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호텔로 가서 『녹색의 하인리히』를 읽어줘도 되겠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지..
1928년 호퍼는 찰스 버치필드의 그림에 관한 글에서 이런 생각을 다시 한번 피력한다. 그는 이 글에서 미국회화의 전통이 유럽 모델에 연원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19세기 미국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과, 다음과 같이 말했던 괴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다. "모든 예술 활동의 처음이자 끝은 내 안의 세계를 통해서 내 주위에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다." 호퍼는 (중략) 예술 활동의 근간을 세계의 변화에 두고 있다. (중략) 호퍼는 버치필드가 경험세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회화의 상징들을 택했다는 점을 칭송하면서 그를 이렇게 평한다. "지금처럼 복잡한 세상에 그토록 단순하고 그토록 자연스런 방법을 쓴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체계적인 사유에 관해 한 가지만 더 말하자. 사유하는 자는 체계화에 끌리게 마련이다. 언제나 그는 그런 유혹에 빠진다.(이 책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나도 그런 유혹을 받는다.) 자기 아이디어의 모든 결과를 서술하고 싶고, 사람들이 제기할 모든 이의를 예견하고 사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싶은 유혹에 말이다. 한데 사유하는 자는 타인에게 자신의 진실을 납득시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체계의 길, '신념을 가진 사람'의 가련한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정치가들은 그런 사람으로 불리길 좋아하지만, 신념이란 게 무엇인가? 정지된 사유, 굳어 버린 사유요,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곧 한정된 사람이다. 실험적 사유는 설득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한다. 어떤 다른 사유에 영감을 주고, 사유..
얼마 전 나는 택시를 타고 파리 시내를 가로질렀는데 운전사가 무척이나 말이 많았다. 그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만성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중략) "제 뒤에는 당신보다 삼 분의 일은 더 긴 인생이 있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더 가진 그 삼 분의 일로 뭘 할 겁니까?" "글을 쓰지요." 나는 그가 쓰는 게 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자기 인생에 대해 쓰고 있었다. 바다에서 사흘 동안 헤엄을 치며 죽음에 맞서 싸웠고, 잠은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살고자 하는 힘은 간직한 남자의 이야기. "자식들을 위해 쓰는 겁니까? 가족 연대기처럼?"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 자식들이오? 그런 데 관심 없을 겁니다. 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택시 운전사와 나눈 이 대화는 내게 불현..
아이러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에마 보바리는 견딜 수 없는 여자인가? 혹은 용기 있고 감동을 주는 여자인가? 그리고 베르테르는? 다정다감하고 고상한가? 혹은 공격적인 센티멘털리스트이거나 이기주의자인가? 소설을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답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소설이 애당초 아이러니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진실'은 감추어져 있을 뿐, 발설되지도 발설할 수도 없다. 조지프 콘래드는 『서구인의 안목(Under Western Eyes)』에서 한 러시아 혁명주의자의 입을 빌려 "라주모프 씨, 여자와 아이들과 혁명주의자들은 모든 관대한 본능과 믿음, 헌신, 행동을 깡그리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혐오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라고 말한다. 아이러니는 화나게 만든다. 이는 아이러니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
그들 밤의 첫째 단계의 끝. 기사가 지나치게 의기양양해하지 않도록 그에게 동의해 준 그 입맞춤이 또 다른 입맞춤에 이어졌고, 입맞춤들이 "빨라졌고, 간간이 대화를 중단시켰고, 그것을 대체해 버렸다……." 한데 그녀가 몸을 일으키더니 길을 되돌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가. 참으로 기막힌 연출 예술 아닌가! 최초의 그 성적 욕구의 혼란을 맛본 뒤, 사랑의 쾌락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열매임을 보여 줘야 했던 것이요, 그 값을 올리고 좀 더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야 했던 것이요, 파란을, 긴장을, 긴박감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기사와 함께 성으로 되돌아가면서 T 부인은 공허 속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가장하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상황을 뒤엎고 데이트를 연장할 전권을 쥐리란 걸 잘 안다. 그야 문장 하나면, 해묵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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