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자동차 번호판이다. 그 네모난 금속판 위엔 항상 알록달록한 무지개가 떠있다. 시선을 이리 돌려도 보이고, 절로 돌려도 보인다. 어쩐지 귀여운 장난 같아서 속 안의 심각한 매듭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다. 물론 이곳이 꿈과 희망에 가득 찬 섬이라 그 상징으로써 그려놓은 건 아니다. 국지성 비가 자주 내리는 하와이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무지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무지개를 처음 본 건 도착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내로 진입할 즈음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해가 멀쩡히 떠있어도 꿋꿋하게 내리는 여우비였다. 남국의 섬에선 흔히 있는 일이겠거니 하는데, 저 멀리 아치형의 프리즘이 반짝였다. 빨. 주. 노..
"하와이에 혼자 오셨어요?" 의아한 눈빛과 함께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그러면 대답할 구실이 있으면서도 입 열기가 망설여졌다. 어째서 "혼자 오셨어요?"도 아니고 "하와이에 혼자 오셨어요?"일까. 남자 혼자 하와이에 온 걸 이상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해할 순 있다. 신혼부부, 가족, 동창 모임 등 하와이행 비행기를 타는 다양한 사람 중에서도 이만큼 희박한 경우의 수가 없으니까.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으면, 문득 함께 차를 탄 이 남자가 같이 온 일행이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들은 어디까지 추측하고 어떤 상황까지 상상하게 될까. 외톨이 여자는 눈빛에서 사연을 읽을 수 있지만 외톨이 남자는 의뭉스러워 보이기만 한다. 돈 많은 한량으로 치부하려 해도 지갑이 두툼해 보이는 행색은 아니다. 사..
낮 처음 호놀룰루 시내로 들어갈 땐 곳곳에 콘크리트 젠가가 쌓여있는 줄 알았다. 도시 자체가 급하게 성장하고 급하게 지어졌다는 인상이어서 섬 어딘가에 성장 촉진제가 꽂혀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화의 개성이나 건축적 미학보다 실용성과 유용성에 무게를 두는 경향 때문일까. 이국적인 느낌은 팔라우나 로마의 외곽도로, 아니 몇 시간 전 떠나온 인천 공항만도 못했다. 우선 차에서 내려 거리를 걸어 보아야 차창 너머로는 보이지 않았던 대상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야자수들은 늙고 성급한 도시에 활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서너 그루씩 옹기종기 모여서 웬만한 건물 높이만큼 뻗어 올라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그네들은 마치 익살스럽게 조각된 토템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에서 춤판이..
하와이에 갔을 때 하필이면 2011 APEC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현지 여행사들은 공항으로 이어진 H1 고속도로와 호놀룰루 시내가 언제 어떻게 통제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초긴장 상태였고, 관광객들은 정상 회담엔 무심한 채 섬이 어서 낙원을 보여주길 기대하느라 바빴다. 걱정하는 무리와 걱정을 하고 싶지 않은 무리 사이에서 그나마 희망적이었던 건 대폭 강화된 경찰력 덕분에 마음 놓고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겠다는 우스갯소리 정도였다. 실제로 회담으로 인한 불편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외곽 도로가 통제될 때는 시내로 들어오는 교통량이 현저히 줄어들어 도로 위에 남겨진 모든 것들이 평소보다 유쾌한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하나우마 베이 같은 관광지의 사정은 조금 달라서 종종 해변이 통제되는 일도 있긴 했다. 외..
핑계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떠난 후 잃을 것들을 걱정하느라 주저하면서. 일단 여기를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희망과 열정의 조각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질 거라 기대한다. 사회적 지위와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의 십 순위 후보에도 올려놓지 않을 거면서. 멀리, 오래 떠나면 충분히 책 한 권은 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다. 결국 문제는 돈, 사람, 시간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완벽한 나의 핑계. 그리고 착각. 두려움 길 위에서 산다고 가정했을 때, 세월의 일부를 뭉텅이로 잘라 쓸 만큼 먼 길을 떠난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두 가지가 두렵다. 나에겐 길 위에서 주워담은 생각, 감정, 경험을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운이 좋게 그런 재주를 발휘한다 해도 ..
어딜 가든 표지판을 눈여겨 봐. 그 나라 말로 뭔가를 설명하거나 경고하려는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어. 아니면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구나 교사의 얼굴을 하고 있거나. 표지판을 보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돼. 드 보통이 말했지, "어떤 자리에 고향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것을 대신해서 자신의 성향에 더 들어맞는 낯선 대상이 있을 때 이국적인 정서를 느낀다"고. 나한텐 그것이 표지판, 푯말, 대충 그려 놓은 낙서 따위인 셈이야. 이등변 삼각형, 길쭉한 마름모, 옆으로 퍼진 직사각형과 완벽한 곡선의 원. 꼴도 색도 제각각인 바탕 위에 다른 언어가 쓰여있는 게 좋아. 아무리 많은 외국인 사이에 있어도 푯말을 한 번 올려다보는 것만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믿을지..
하와이로 떠나기 전부터 좀 아팠다. 건조한 공기 속에서 여덟 시간의 비행을 마칠 무렵엔 몸살감기도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나와 함께 착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와이의 후텁지근한 바람은 기대와 달리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어컨 바람만 곳곳에 매복하여 한 발 한 발 치명적인 총알을 쏴댈 뿐이었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이렇게 앓는다. 상하이로 가족 여행을 다녀올 땐 마지막 날 식중독 비슷한 증세가 나타났고, 팔라우에선 배를 타다가 비를 쫄딱 맞고 만사 의욕을 다 잃었다. 그러고 보면 융프라우요흐에 올라 어르신들도 끄덕없는 고산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몸이 아프면 서럽기도 하지만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피부나 감각이 딱딱한 치즈처럼 둔감해져서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절묘한 예술 작품을 눈..
초승달 같은 해변에 앞다투어 모인 특급 호텔들이 가장 좋은 경치를 독점한다. 해변으로 나가려면 호텔과 호텔 사이에 난 골목길을 걸어야 했다. 에어컨디셔너의 실외기가 윙윙거리고 반쯤 열린 창문에선 저녁 준비하는 냄새가 풍긴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는 주방장과 벨보이들은 로비나 식당보다 이곳에서 더 마음 편해 보였다. 골목 끝은 눈부시게 빛났다. 백사장을 밟는 순간, 빛과 소리의 파도가 등 뒤 골목 안으로 쓸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석양, 바다, 모래, 몸매를 솔직히 드러낸 단벌 팬츠와 비키니. 지도를 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와이키키 해변에 모여있었다. 강렬한 빛의 이미지는 시간과 생각의 흐름을 걸쭉한 소스처럼 느려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지평선 부근에 드리워진 구름의 그림자가 천천히..
오하나 웨스트 호텔 앞에 커다란 식료품 마트가 하나 있다. 이름도 푸드 팬트리(식품 저장실). 너무 솔직하게 자아를 드러내는 이름이다.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고 마트 뒤편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한 남자가 지게차에 오른다. 주차장 곳곳에 쌓인 커다란 박스가 그의 일거리다. 시동을 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스스럼없이 웃어 보였다. "일본 사람이에요?" "아뇨, 한국 사람인데요." "그래요? 여긴 한국 사람도 참 많아요." 그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았다. 기다란 손잡이를 움직이자 곤충의 집게 같은 쇳덩이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가 재미있는 거 하나 보여 드릴게요." 능숙하게 박스 밑으로 받침을 집어넣은 남자는 푸드 팬트리 건물 가까이 차를 댔다. 그런데 일 층엔 벽뿐이었다. 재고를 집어넣을 ..
이곳은 하와이의 섬 중 제일 크다는 이유로 빅 아일랜드라고 불려. 사실 이 섬의 진짜 이름이 하와이지만 많은 사람이 와이키키 해변이 있는 오하우 섬을 하와이라고 생각하지. 섬이야 저를 뭐라 불러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본명을 잃었다고 슬퍼지는 건 감정이입을 잘하는 인간만의 속성이겠지. 빅 아일랜드엔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활화산이 있어. 이곳의 산은 해발이 높지만 능선은 젖무덤처럼 완곡하고 부드러워. 구름이 드리워지면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의 동산처럼 보일 정도야. 6인승 승합차를 타고 화산 국립공원에 올랐어. 고도가 높아질수록 활엽수가 고개를 숙이고 침엽수가 늘어나. 어쩐지 풍경도 삭막해져, 다시 살아나기 어려운 중환자처럼. 그러다가 드디어 사시사철 수증기가 올라오는 분화구를 볼 수 있는 거야.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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