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로 돌아와 늘어지게 낮잠을 잔 후, 오랜만에 저녁 산책을 나섰다. 손님이 아주 많은 식당에서 그저 그런 식사를 비싼 값에 먹고 나오는데, 꽝시 폭포에서 만났던 홍콩 친구 데이지가 팬 케이크를 먹으며 걸어오는 걸 보았다. 우린 즉시 서로를 알아보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 루앙 프라방을 떠나 방비엥에 도착한 그녀는 스위스 친구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자는 숙소보다 훨씬 비싼 우리의 숙소 때문에 그녀는 항상 우리를 '리치 가이'라 부른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고,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이다. 그녀는 아베크롬비 앤드 피치 매장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었고, 우리 역시 각자의 직장에서 경비를 마련했다. 하지만 학생인 그녀와 직장인인 우리 사이엔 차이가 있을 ..
일어나도 가라앉지 않은 알레르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오늘도 일찍 일어났지만, 꾸물거리고 미적거렸다. 드럽게 느린 와이파이로 여행기를 올린 후, 몇 번이나 팔의 상태를 확인했다. 본다고 나아지진 않는다.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한 다음 정오를 조금 넘겨 강가로 향했다. 강가에는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방갈로가 여러군데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변에 작은 오두막이 지어져 있어서 거기 드러누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있었다. 방갈로가 어떤 상태인지 둘러보고 맥주 한 병을 겨드랑이에 낀 채 오두막에 앉자, 아, 드디어 평화가 나에게 찾아왔다. 강에는 백인 아이와 라오인 아이가 나란히 발가벗고 수영을 하고 있다. 국적, 아니 인종조차 알 수 없는 한 부부는 수영복을 입은 채 태양 아래 늘어져 책을 읽고..
방비엥에 도착하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총 8시간 30분의 곡예비행을 마치고 땅에 착륙한 비행사가 된 기분이었다. 방비엥의 첫인상 역시 루앙 프라방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구역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게 좋았다. 우리는 흥정할 것도 없이 (아저씨에게도 흥정할 마음이 전혀 없기도 했지만) 툭툭이를 타고 미리 예약한 숙소 옆에 내렸다. 구활주로에서 들려오는 현지인들의 축제 소리에 시끄럽긴 했지만, 숙소 상태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찬물로 샤워하자 기분도 풀렸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음악도 우리를 힘 나게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듣던 대로 방비엥엔 한국인이 정말 많았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젊은 친구들과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은 중년 남녀의 무리를 지나쳤다. 강가 주변에는 K..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기니까 여행의 절반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뭔가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은 아무리 신비 절정의 외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내가 굳이 일주일을 넘는, 그러니까 최소 한 달 이상의 여행을 떠나려 했던 건 그 긴 시간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내가 어떻게 그 환경을 받아들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꽁한 마음이 풀릴까? 자연스럽게 아무하고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향수라는 걸 느낄까? 글은 잘 써질까? 동행자와 싸우진 않을까? 뭔가 더 배우는 게 있을까? 꽤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성격이 드디어 무너지고 본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마지막 질문에서 멈춰 보자. 평소 난 정말 무난한 성격이다. 사회생활을 예로 들자면, 위로는 그럭저럭..
여행의 딱 반이 되는 오늘, 루앙 프라방을 떠나 방비벵으로 향한다. 이젠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이곳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규칙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은 제일 안 좋았다. 한 차례 감기가 몰려들고 체기도 스쳐 지나가더니 이제는 햇빛 알레르기가 남았다. 오히려 밤늦게까지 놀고 오후 늦게 일어나는 패턴이 더 잘 맞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밤부터 새벽까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 배를 타는 것보단 낫겠지만, 하필 버스를 타는 날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린다니. 그러고 보면 이번 여행에선 타볼 수 있는 교통수단은 다 타보는 것 같다. 비행기, 열차, 배에다가 버스까지.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씻고 짐을 정리하고 앉아있으니..
그래도 루앙 프라방 주변에서 뭐 하나는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오늘은 꽝시 폭포에 간다. 약속 시각이 되자 사람을 가득 태운 밴이 숙소 앞에 멈췄다. 일본인 네 사람, 한국인 두 사람, 홍콩 출신 한 사람, 그리고 미국인이 세 사람 정도 있었다. 어떤 공간 안에 아시아인이 더 많은 경우는 처음인 것 같았다. 게다가 나와 D까지 하면 한국인이 네 사람이다. 한국 친구들은 이십 대 중반 정도로 우리처럼 남자 둘이서 여행을 왔다고 한다. 일본 여성 네 명은 봉사 활동 겸 라오스에 왔고(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학생인 홍콩 여성은 방학 중에 베트남과 라오스를 여행한다고 했다. 동양인이 가득하자 어쩐지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루앙 프라방을 벗어나 꽝시 폭포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비로소 라오스에서 기대..
많은 꿈을 꿨다. 새벽과 아침 녘 꿈에서 서울은 기어코 나를 찾아와 놓아주지 않았다. 이왕 얌전한 꿈을 꿀 바에야 메콩 강을 유영한다거나 루앙 프라방 푸씨 산에 올라 이 조그만 도시의 곳곳을 날아다닌다거나 하는 꿈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습게도 나는 일을 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6월 초의 긴 연휴 기간, 그러니까 추석 비슷한 명절을 앞두고 있었다. 사무실에 남아 밀린 일을 처리하며 이제 좀 쉬겠구나 한숨 돌리는 찰나, 갑자기 나의 남은 여행은 어디로 갔는지 몹시 궁금해지다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아, 나는 지금 여행 중이구나. 이곳은 서울이 아니구나. 눈을 떴을 때, 으레 들리곤 하는 스쿠터 엔진이 부릉 거리는 소리와 하이톤의 새소리가 들려왔다. 기..
가방을 사고 다시 나이트 마켓이 열리는 사거리로 돌아와 조마 베이커리란 곳으로 향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비엔티안과 하노이에도 지점이 있는 조마 베이커리의 최장점은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데다가 에어컨도 있다는 것이었다. 커피도 맛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자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고, 결국 우리는 바깥 자리로 옮겼다. 다행히 차양 아래 그늘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했다. 계속 특별한 일은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모처럼 여유를 만끽하는 기분이 드는 건 또 왜일까. 역시 난 카페가 맞는 것일까. 저번 삿포로 여행과 이번 동남아 여행을 쭉 지켜본 결과 나는 다양한 카페와 시끄러운 음악을 듣기 위해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중간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루앙 프라방에서 삼 일째를 맞이하자, D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쭉 돌면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자, 마침내 이곳에 길이 드는 것 같다. 어제가 스쿠터의 날이었다면, 오늘은 스쿠터를 빼앗기는 날이었다. 오늘 오후 7시에 반납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제 오후 7시까지였고, 아침 열한 시쯤 직원이 스쿠터를 찾으러 온 것이다. 아침부터 스쿠터를 타고 시내를 크게 한 바퀴 돌고 오겠다던 D의 꿈은 무너졌다. 기름을 단 한 칸도 쓰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라니. D가 직원에게 기름이 꽉 채워놨다고 말하자 그 직원은 내일 이 스쿠터를 빌리는 사람이 럭키라며 농담을 했다. 그래, 좋겠다, 그 누군가는. 그래서 오늘은 D도 자전거를 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쿠터를 타다가 많이들 다친다는 어제..
본격적인 루앙 프라방에서의 일정을 쓰기에 앞서 난감한 마음뿐이다. 우리가 루앙 프라방에서 머문 시간은 4박 5일로 방콕만큼이나 길었지만, 한 일이 거의 없을 정도다. 조식이 포함이라 매일 아침을 먹고, 조금 뒹굴다가 마실을 나가고, 저녁이 되기 전에 들어와 쉬다가 다시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그리고 밤 10시도 되지 않아 들어오길 반복했던 것이다. 루앙 프라방 둘째 날인 오늘의 특별 행사라면 D의 스쿠터와 나의 자전거라고 할 수 있겠다. 어제 좀 다녀봤더니 도저히 걸어 다녀선 체력이 안 될 상황이라 리셉션에 말해 스쿠터를 한 대 빌렸다. 난 한 번도 스쿠터를 타 본 적이 없고, D는 중학생 시절에 이미 배워뒀다고 한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좀 망설여지긴 했지만, 이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은 스쿠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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