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에세이] 2011 유럽 여행기 (0) - 주마간산(走馬看山) 보러가기 1.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똑같은 골목, 똑같은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댔을 때 울리는 똑같은 인사말도 기나긴 여정의 시작일 땐 평소보다 특별하게 느껴진다. 묵직한 캐리어와 손때 묻은 여행책자는 신문이나 휴대전화에 몰두해 있는 옆 사람과 전혀 다른 운명을 예고한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 도시, 이 나라를 떠난다는 생각이 자기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희망과 기대가 빚어낸 이런 묘한 감정은 어느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비추는 햇살을 볼 때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순간 말이다. 갑자기 삶이 아름다워 보이고, 머리를 아프..
갑자기 8일 정도 유럽을 가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십중팔구는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유럽 출장이 출발 닷새 전에 결정이 되면 본인이야 당황스러워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선 저 친구 제대로 운이 좋구만,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유럽이지 않냐며 격려하는 반응도 상당하다.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가 25개국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다시 그만큼이나 더 존재하는데, 어느 나라를 가느냐와는 상관없이 그저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돼서 좋겠다는 건 그 땅에 대한 지나친 동경인지도 모른다. 하긴 멀기도 멀고, 비행기 삯도 비싼데다가, 세계사를 배우는 순간부터 의식 속에서 서양 역사와 문화의 나침반은 그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니 당연한 일일까. 이렇게 말하..
2. 색色을 위한 찬가 아는 단어가 많지 않거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구름을 흰 것과 회색인 것, 또는 큰 것과 작은 것으로밖에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심지어 '있다'와 '없다'로 분간하는 게 최선인 사람마저 있을지 모른다. 183개의 회원국과 6개 지역이 참가하는 세계기상기구(WMO)에서 구름의 종류를 크게 열 가지로 분류한 노력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셈이다. 물론 이 범세계적인 기구에서 글과 그림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구름의 분류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지금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어디에 속하는지 맞출 확률은 굉장히 낮다. 어지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 놀랍도록 천진난만한 수증기 덩어리들의 ..
1. 기대 휑한 들판과 활주로 같은 도로엔 겨울 색이 완연했다. 추위로 기록을 경신하는데 재미가 붙은 계절은 그나마 열차 안에선 유예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정거장에 멈춰 한쪽 문이 일제히 열릴 때면 잊지 말라는 듯 가혹한 바람이 실내를 두드렸다. 그 심보엔 문신이 새겨진 근육을 뽐내는 사나이처럼 남세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번 여행지가 여기와는 180도 다른 계절이 지배하는 장소라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추운 나머지 크리스마스의 독특한 분위기조차 얼어붙지 않았던가. 덕분에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성탄절은 벌써 희미한 축제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흰 눈을 덮고 길게 길게 눕는 들을 보고 있자 오늘에서야 경건한 축일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여행 자체보단 다른 데 기대를 품고 있었다...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9) - 프라하, 넷. 마지막 날] 보기. 하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거대한 굴뚝에서 뽑아 올린 것 같은 구름은 여전히 대류권을 장악중이었다. 그 아래로 차가운 습기가 뚝뚝 떨어졌다. 물 먹은 공기가 축 늘어지자 축제의 풍악도 울림새가 처량했다. 어느 겨울, 프라하의 아침. 유럽에서의 마지막 스케치. 객실 밖 창문으론 옆 건물의 낮은 옥상이 보였다. 공장지대나 산업도시의 변두리를 연상케 하는 거리도 시야에 잡혔다. 흐린 하늘이 나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나의 감정이 흐린 하늘을 곧 작별할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인지는 모호했다. 그저 회색빛 손길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호텔 내부에도 스며들었음만 확실했다. 막 깨어난 몸을 추스르자 식당은 좀 다를지 모른다고 믿..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8) - 프라하, 셋. 프라하 성] 보기 맥도날드는 많은 배낭 여행자들에게 있어 일종의 성지다. 빠듯한 예산과 일정 안에서 돈과 시간을 아끼기엔 이보다 안성맞춤인 곳이 없다. 탄수화물, 단백질, 약간의 비타민과 다량의 나트륨, 그리고 풍부한 지방이 함유되어 있으니 일단 인간은 햄버거만으로도 움직일 순 있는 셈이다. 그저 영양소의 비율이 문제일 뿐이지. 맥도날드가 들어선 지역을 붉게 표시한 '맥도날드 지도'를 보면 이 패스트푸드 공장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비만과 성인병, 거대 자본에 의해 변질된 인간의 식습관 같은 문제들을 잠시 뒤로 밀쳐놓으면 재미있는 사실이 보인다. 이런 전 세계적인 매장에 발을 들임으로써 여행지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이겨낼 수도..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7) - 프라하, 둘] 보기 다시 프라하 성을 오르던 순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명소로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로, 카를교에서 바라본 자태를 떠올린다면 누구나 그 거대한 성곽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을 호기심이 - 저 그림 같은 풍경 속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숨어있을까? - 이제 막 충족될 찰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지에서의 기대는 곧잘 깨어질 위험에 처하는 위태로운 존재다. 이 길의 끝에서 프라하 성도 우리의 기대에 무관심한 곳이었단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매번 상처 받으면서도 다시 사랑에 빠지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로선 매번 새로운 기대를 잉태하는 것 역시 멈출 도리가 없다. 프라하 성으로 들어가자. 입..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여행기 (16) - 프라하, 하나. 구시가지] 보기 카를교에서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려면 적잖이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성을 머리 위에 얹은 흐라트차니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다.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워낙 시선을 빼앗는 장면이 많아 앞만 보고 걸을 순 없다. 빙빙 돌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미로가 있달까.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을수록 도시가 자세를 낮추더니, 마침내 색 바랜 적갈색 지붕을 우리의 발밑에 내려놓는다. 군데군데 눈이 덮여 배색이 더 멋스러웠는데, 언뜻 보면 붉은 빵 위에 파우더를 뿌려놓은 것 같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어찌 프라하 시내의 전경뿐이겠냐만은 앞으로도 겨울 여행을 고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여기서이다. 점점 성이 가까워진다. 새삼스레 뒤를 돌아..
[바닐라 스카이의 유럽 여행기 (15) - 프라하로 가는 길] 보기 프라하의 중앙역인 Hlavni nádrží의 역사는 작은 공항을 연상케 한다. 외국으로 오고 가는 열차가 주로 이곳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렸다. 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할 순 없었지만 그들이 끌고 가는 캐리어, 또는 등에 맨 배낭을 보면 길을 떠난 사람이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는 점은 반도국에다가 분단국이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참 생소한 일일 수밖에 없다. 우선 가지고 있는 돈을 체코화인 코루나로 바꿔야 했다. 역의 환전소는 환율이 안 좋다고 하여 남은 유로화도 소진할 겸 가지고 있던 30유로만 모두 바꿨다. 그리곤 24시간 교통 패스를 ..
[바닐라 스카이의 짧은 유럽 여행기 (14) - 빈(비엔나), 다섯. 케른트너 거리] 보기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여행을 정의하는 많은 달콤한 말 가운데 알랭 드 보통의 이 한마디만큼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말도 없다. 덧붙여 그는 여행의 모든 운송 수단 중에서도 '기차'를 제일의 산파라고 말한다.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실제로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열차에서 내리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 여행에 낭만을 품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눈이 많이 내리던 빈의 마지막 모습. 그런 연유에서인지 아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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