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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치토세 공항에서 날 반겨준 건 삿포로 맥주 포스터였다. 북해도에서만 판매한다는 삿포로 클래식의 하얀 거품을 보며 어떤 곳에선 랜드마크도 아름다운 모델도 아닌 알코올음료가 먼 길 온 손님을 반겨줄 수도 있다는 새로움을 맛봤다. 열차를 타기 위해 건너간 국내선 청사에 있던 수많은 매장도 그랬다. 북해도의 온갖 먹거리들이 다 모여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여행을 끝낸다고 해도 이 동네에서 어떤 먹거리가 유명한지 남들에게 자랑할 순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건 공항의 의무나 다름없었다. 당신, 열심히 보고 듣고 돌아다니느라 기념품 살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여기서 전부 챙겨가세요. 인천 공항의 면세점에도 한국 특산품인 김이나 홍삼, 제주도에서 건너온 초콜릿이 있지만, 신치토세 공항의 기념품점은 더욱 다양한 것들이 더욱 집약돼 있다. 물론 나처럼 북해도에 처음 온 사람으로선 뭐가 뭔지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크긴 하다. 나중에 돌아다니며 눈에 익고 나서야 아, 그때 보았던 것들이구나 그때 사람들이 많이 먹던 것들이구나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이다. 꼭 공식이나 원리를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처럼 말이다. 공항엔 여행의 복습 문제집 같은 면이 있다.
 하지만 숱한 상자며 포스터며 사진과 그림과 색상이며 눈앞이 휘황찬란해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캐리어를 세우고 코트를 벗어 팔에 끼운 다음 그 모든 매장을 지나쳐 상대적으로 허름해 보이는 키오스크에 들어갔다. 내가 북해도에서 처음으로 쓴 돈은 물을 사기 위해서 쓴 돈이었다. 매표기에서 티켓을 끊고 플랫폼에 잠깐 닿았을 때야 바깥 공기가 얼마나 차가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 곧 출발하려는 열차를 잡아탔다. 39분이라는 어중간한 시각조차 일본의 열차는 칼 같이 지킨다. 그 고집에 감탄할세라 곧 좌우로 펼쳐진 교외의 풍경에 사로잡혔다. 서쪽으로는 태양이 안간힘을 쓰며 타오르려다 끝내 사그라지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높아도 이 층을 넘지 않는, 마치 공작실에서 조립해 온 듯한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공항에 내리기 전 비행기에서 보았던 모형 같은 집들 사이로 나는 안착하고야 만 것이다.
 도로의 이쪽 편에서 저쪽 편까지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뻥 뚫린 걸 보면 과연 바둑판식으로 공을 들여 구획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도로는 획일적일지언정 개개의 주택은 개성을 잃지 않았다. 아담한 신식 주택들은 할당된 크기 안에서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때로는 여러 채가 색만 달리한 채 똑같은 형태로 지어져 군체 생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또 외자재엔 어쩜 그리 예쁜 색을 입혔는지. 몇 번 근거도 없이 주장한 바지만, 컬러풀한 집에 사는 사람은 회색 돌덩이 속에 사는 사람보다 조금이나마 더 행복할 것 같다. 베네치아의 부라노 섬이나 마닐라 공항 주변의 서민적인 거리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여기 치토세에 사는 사람들 말이다.
 열차 안은 고요했다. 대만을 다녀온 듯한 일본인 커플이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며 여정을 되새김하고, 한 장 한 장에 담긴 기억을 공유하다가 가끔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 외에는 정말 바람 가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 밖으로 제 플레이리스트를 늘어놓는 사람도 없었다. 옆에 앉은 여자는 선사시대부터 사용했을 법한 랩톱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소리도 너무나 가깝지만 동시에 아주 조심스러워서 들린다기보다는 듣고 싶고 들어야만 하는 무엇이 되었다. 문득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여섯 시는 된 것처럼 어둡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곳은 해가 빨리 지는 땅이구나. 약한 감기 기운 비슷한 나른함이 밀려왔다. 보기에도 듣기에도 나지막한 세상이다. 나는 열차 안에서 곧 도착할 도시가 어떤 곳일지 감히 가늠할 수 있겠다고 믿고 말았다.














Canon EOS-M + 2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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