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배에도 액티비티는 있었다. 로빈슨 섬 앞에 정박하곤 배에서 다이빙하기. 깟바 섬에서 자전거 타기. 몽키 아일랜드 가서 원숭이를 구경하고 해수욕하기. 수영을 잘 못하는 나로서는 방비엥 블루라군에서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뛰었음에도 로빈슨 섬에서의 다이빙에 도전하진 못했다. 게다가 숙취 때문에 좀비처럼 누워있던 친구들이 물에 들어갈 시간이 되자 갑자기 되살아나서 활개를 치는 통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방비엥에서 샀던 수영복은 비엔티안 삐 마이 때 물을 맞은 후 찢어지는 바람에 버렸고, D가 빌려준 바지는 가방 안에 있었다. 그걸 갈아입는 것 또한 귀찮았다. 그러나 물은 맑았고, 배에서 바다로 곧장 떨어진다는 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깟바 섬의 서쪽인가 남쪽에 정박해 왕복 10km 정..
다음 날, 우리는 배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갈아타기 전, 배는 바다 위 진주 농장에 잠깐 들렀다. 마치 어제의 동굴이나 해변이라도 되는 것처럼 꽤 많은 크루즈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다 같이 글을 양식하는 모습과 진주의 씨앗을 이식하는 과정과 결국 삼 년된 운 없는 녀석에게서 진주를 꺼내는 과정까지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단체 여행에 쇼핑이 포함되어 있듯, 진주 농장 방문도 현지 여행사의 부수입이 되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루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사지 않은 듯했지만. 진주를 얻어내는 과정은 딱히 윤리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앞으로 잘 자랄 것으로 보이는 조개를 골라 거기에 코어를 이식하고, 몇 년이 흐를 때까지 그물에 묶거나 망에 담아 기르는 게 말이다. 멀쩡하고 값비싼 진주..
크루즈의 밤 일정은 예상했던대로 조용했다. 친절한 가이드는 우리에게 삼십 여 분의 샤워할 시간을 줬다. 그리고 스피링롤을 직접 만들어 먹고 저녁을 먹은 후 원하는 사람은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나와 D는 번갈아 씻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더운 것보단 훨씬 낫지만, 바람을 많이 맞다보니 훨씬 더 피로해지는 것 같았다. 샤워를 일찍 끝내고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맨 위 갑판 선 베드에 잠시 누워있었다. 엄청난 수의 별을 기대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미리 올라와 있던 사람들은 이 순간이 아주 좋다는 대화를 나눴다. 다들 친절했고 친화적이었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이 간섭하지도 않았다. 배는 한 군데 닻을 내리고 정박해 바람에 따라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았다. 멀미는 나지 않..
하롱베이엔 삼천 여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각각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배가 그 바로 옆을 지나갈 때는 절로 고개를 들어 꼭대기를 올려다 보게 되었다. 석회암 섬은 꼭 하늘에서 떨어져 바다에 막힌 모양새였다. 그 위에도 나무는 무성하라 머리카락처럼 돌덩이를 덮었고, 그곳에 둥지를 튼 새가 이따금씩 순찰을 돌았다. 수면고 맞닿는 부분은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에 깎여나가 안쪽으로 파여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얇은 줄기만 남아 섬을 지탱하다 결국 쓰러질지도 몰랐다. 아마 내 생애에 그런 광경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세월의 힘엔 놀랄 뿐이다. 바다에 크고 작은 섬이 수없이 자란 풍경은 팔라우에서 보던 것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개체 수가 훨씬 많았다. 게다가 우리가 타고 있는 것 같은 수많은 크루즈가 ..
아침에 눈을 떴는데 머리가 좀 아팠다. D가 "7시 35분이야!"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처음에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7시 35분이면 이른 거 아닌가? 우리가 나갈 시각은 정오가 아니었나? 그러나 곧바로 하롱베이 투어를 시작하는 밴이 8시에 우리를 픽업하러 오기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짐도 제대로 안 싸뒀는데 끔찍한 일이었다. D는 머리를 감고 그 비눗물로 그대로 샤워를 했다고 하고, 나는 그나마 제대로 샴푸를 하고 샤워를 했다. D가 먼저 내려가고, 나는 마무리를 하는데 방으로 전화가 왔다. 8시 5분이었다. 라오스에서는 약속 시각에서 기본적으로 20분은 늦게 오고는 했는데, 베트남은 칼 같다. 나는 배낭을 맨 채 뭐 빠트린 게 없나 방안을 훑어보고는 황급히 로비로 내려왔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하노이의 기온은 삼십 도 초반을 넘지 않았는데 비엔티안의 더위가 우리를 따라온 모양이다. 오늘은 삼십 도 중반에 습도도 높았다. 체감온도를 확인해 보니 무려 사십이 도. 습도는 64%다. 그냥 걷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우리만 유난을 떠는 건 아닌 모양인지 여행자들은 물론 베트남 사람들도 아주 지쳐보였다. 딱히 인사할 거리가 없을 때, 그들은 오늘 너무 덥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하긴 열 번 반복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살인적인 날씨이긴 했으니까. (체감 상으론 이번 여행 중 가장 더운 날이었다.) 그리하여 이 끔찍했던 날의 기록을 빠르게 쓰고자 한다. 떠올리기만 해도 땀이 나려하니까 말이다. 호텔에선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아 머리를 감다 말고 욕실에서 튀어나와야..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짐을 찾고 환전을 하는데 환전소 여자가 D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D가 한국이라고 대답하며 왜 궁금했냐고 되묻자 여자는 웃으면서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뒤에서 백 달러 짜리 지폐를 찾느라 끙끙대는 와중에 얼핏 그 단어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하노이 시내까지 나를 졸졸 따라와 씨앗이 되었다. 내가 여행 중에 풍경 사진보다 인물 사진을 많이 찍고 더 많은 사람과 만나보려고 애쓴 이유가 그렇게 단순한 동기에 있었다. 호기심. 다른 삶에 대한 궁금증. 일상이라는 같은 단어 아래있지만, 우리의 삶은 서로 다르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정치, 경제 체제가 다르다. 도시도 다르고, 그속의 교통 수단도 다르며, 음식과 술, 돈을 ..
비엔티안 왓따이 공항은 예상했던 대로 규모가 작았다. 많은 한국 분들이 하노이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을 전송하는 라오인 가족도 있었다. 그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포옹으로 이모 쯤 되는 여자를 보냈다. 그녀는 아마 하노이에 사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면세점에서 미니어처 위스키와 담배 한 보루를 샀다. 갑자기 문명 세계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은 건 비행기에 올라서다. 우리는 그나마 저렴한 베트남 항공을 선택했는데, 듣던 대로 출고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좋은 기종이었다. 베트남 전통 의상을 개량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돌아다니고, 짐칸 아래는 모니터도 달려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에게 비상구 자리를 배정해 준 카운터 직원에게 감사했다. 비지니스 ..
"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 unknown. Benoni 카페의 바 뒤에는 커다란 분필 글씨로 그렇게 써 있었다. 우리가 아직 괜찮지 않은 건,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건, 아직 우리의 여행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정말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을 상상하는 건 슬픈 일이다.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넘어가는 날에 우리가, 아니 특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카페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던 것밖에 없다. 약 다섯 시간 반을 카페에 앉아 있었다. 쓰고 읽다가 지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시간이 남았다. 좀이 쑤시..
비엔티안에서의 낮 산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길 것 같지도 않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려 했던 이유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비엔티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라오스를 여행하기 위해 공항을 이용하거나(공항이 시내 안에 있다. 여행자 거리에서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십오 분 정도 걸린다.) 여행자 거리에서 커피나 베이커리, 꽤 근사한 식사를 즐기거나 아니면 그냥 걸어다니며 메콩 강 건너편으로 태국 땅을 구경하거나 가끔 마음이 동하면 라이브 뮤직을 하는 펍이나 나이트 클럽에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거나. 이 정도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조심스레 그건 오산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외국 여행자들의 블로그를 봐도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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