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끼엠 호의 북쪽, 구시가지를 향해 가는 길은 아주 북적였다. 현지인을 상대로 하는 가게가 즐비하고 주차된 오토바이가 인도를 점령하고 앞서 나가려고 애쓰는 달리는 오토바이는 차도를 점령했다. 하노이에서 안전하게 길을 건너기 위해서는 걷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오토바이를 무시해야 한다. 그들이 알아서 나를 비켜가 주니까. 종종 경적을 울리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 역시 무시하면 그만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몰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류는 정장을 입고 타는 이들이다. 오토바이와 정장은 얼마나 부조화스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잘 어울리는지. 두 발 전동차를 타고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남자들은 넥타이를 휘날리고 여자들은 다리를 꼭 붙여 치마가 뒤집어지지 않게 애쓴다. 여..
어제 술을 꽤 마셨음에도 푹 자서 그런지 숙취가 없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침대에 누워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할 힘을 내려고 애쓰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든 말든 오늘이 마지막 날이든 말든 나는 꾸물거리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가고 싶지 않거나 하지는 않다. 단지 또 떠나고 싶을 뿐이다. 28일이 이렇게 흘렀으니 다음엔 또 다른 28일을, 내키면 280일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술자리에서 D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곧 결혼을 하는 그로서는 다시 이런 긴 여행을 떠나기가 어려울 거라고. 내 코가 석자인데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직전이니 오히려 축하할 일이다. 새로운 삶은 여행, 그 이상일 것이다. (사실 이 말..
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고 온 마지막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 예약자인 내 이름이 쓰인 웰컴 카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그걸 보자 정말 여행의 끝에 도달했다는 실감이 났다. 사진을 찍은 후 무료로 제공되는 바나나와 초록색 귤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부드럽고 과육이 실한 동남아시아의 과일들. 너희도 일단 안녕이구나. 우리가 잡은 호텔은 서호 주변에 위치했다. 굳이 이 호텔을 잡은 이유는 카지노였다.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재미있게 즐겼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특히 D는 여행 전부터 100달러 정도를 한 번 딱 걸어 운을 시험해 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카오에서는 성공했었고, 마닐라에선 실패했었다. 이번엔 어떨까? 100달러를 걸어 100달러를 벌면 바로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다. 그래..
하노이 상인들이 여행자를 (악의 없이) 등쳐먹는 법은 여러가지다. 우선 택시가 있다. 하노이에 도착한 날, 우리는 열 시가 넘어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사는 미터기를폼으로 켜놓고는 시내까지 가는데 75만 동을 요구했다. 대체로 예약제로 이용하면 40만 동이 넘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랴. 이미 출발해서 그런 말을 했는데. 웃긴 건 하노이 공항을 나서자마자 경찰의 검문에 걸렸는데 운전자를 포함해 뒷좌석에 앉은 우리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모두 50만 동의 벌금을 맞았다고 한다. 그는 그걸 가지고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고소하다는 생각을 물론 했었다.) 우리를 구시가지에 내려놓고 잔돈을 조금만 주는 것이다. 벌금을 물었으니 좀 도와달라고. 여기서 D가 강력하게 제지하며 "그건 네 잘못이..
베트남과 라오스에선 한국차는 물론, 한국 중고차도 자주 볼 수 있다. 연식이 오래된 중고를 싸게 수입해 오는 모양이었다. 중고임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차 이곳저곳에 붙은 한글 스티커나 코팅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처음에 난 왜 그런 것을 뜯지 않았는지, 왜 '자동문'을 그대로 남겨두었는지 궁금했다. 어떤 동경일까, 그저 무신경일까. 그러다가 내가 만약 외국에서 건너온 중고차를 한 대 샀는데 거기에 전 소유주가 붙인 스티커가 남아있다면 그걸 어떻게 할까 상상해 보게 됐다. 그러자 조심스레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건엔 역사가 있다. 표면의 흠집이나 삐걱거리는 구동 기관의 한숨, 또는 주인이 남겨 놓은 이런저런 표식 따위가 그것이 사용돼 온 세월을..
아침 일찍 호텔에서 고수가 들어간 쌀국수를 억지로 먹고 픽업 나온 밴에 올랐다. 어제 방갈로에서 묵었던 나머지 친구들이 전부 앉아 있었다. 물론 오늘 닌빈으로 떠나는 타냐는 없었다. 대신 어제 식당에서 잠시 만난 네 명의 프랑스인이 새로 나타났다. 그들도 배를 타고 하노이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이후로는 그저 이동에 이동일 뿐이었다. 언덕을 넘어 항구에 도착하여 배를 탄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 우리는 다른 배로 옮겨탔고, 거기서 또다른 사람들을 만났으나 별로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후지필름의 미러리스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베트남 보트카 병을 싸갖고 다니며, 담배도 자주 피우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옆에 사람이 있으면 끊임없이 말을 걸었는데, 주제는 주로 자신의 여행 이야기였다. 여행 중에..
깟바 섬 남동쪽에 있는 항구는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선착장엔 별 게 없어보였지만 언덕을 넘자 무수한 숙박업소와 식당, 바와 구멍가게들이 나타났다. 배에 탔던 다른 일행 대부분은 방갈로에서 묵는 듯했다. 우리가 묵는 호텔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깟바 섬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가격은 방갈로가 더 비싸지만, 나름 호텔은 호텔이다. 그것도 전망이 아주 좋은 곳으로. 깟바 섬까지만 여행사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그 이후로는 개별적으로 이동하는 타냐가 먼저 내렸고, 다음에 나와 D가 내렸다. 나머지 젊은 친구들은 계속 배를 타고 방갈로가 있는 해변을 향해 떠나갔다. 사진 상으로는 그냥 그래보였던 호텔이 약간 빛 바랜 흰색 몸체를 보무도당당하게 드러내며 우뚝 서 있었다. 규모 면에서는 ..
이 배에도 액티비티는 있었다. 로빈슨 섬 앞에 정박하곤 배에서 다이빙하기. 깟바 섬에서 자전거 타기. 몽키 아일랜드 가서 원숭이를 구경하고 해수욕하기. 수영을 잘 못하는 나로서는 방비엥 블루라군에서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뛰었음에도 로빈슨 섬에서의 다이빙에 도전하진 못했다. 게다가 숙취 때문에 좀비처럼 누워있던 친구들이 물에 들어갈 시간이 되자 갑자기 되살아나서 활개를 치는 통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방비엥에서 샀던 수영복은 비엔티안 삐 마이 때 물을 맞은 후 찢어지는 바람에 버렸고, D가 빌려준 바지는 가방 안에 있었다. 그걸 갈아입는 것 또한 귀찮았다. 그러나 물은 맑았고, 배에서 바다로 곧장 떨어진다는 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깟바 섬의 서쪽인가 남쪽에 정박해 왕복 10km 정..
다음 날, 우리는 배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갈아타기 전, 배는 바다 위 진주 농장에 잠깐 들렀다. 마치 어제의 동굴이나 해변이라도 되는 것처럼 꽤 많은 크루즈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다 같이 글을 양식하는 모습과 진주의 씨앗을 이식하는 과정과 결국 삼 년된 운 없는 녀석에게서 진주를 꺼내는 과정까지 지켜보았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단체 여행에 쇼핑이 포함되어 있듯, 진주 농장 방문도 현지 여행사의 부수입이 되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루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사지 않은 듯했지만. 진주를 얻어내는 과정은 딱히 윤리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앞으로 잘 자랄 것으로 보이는 조개를 골라 거기에 코어를 이식하고, 몇 년이 흐를 때까지 그물에 묶거나 망에 담아 기르는 게 말이다. 멀쩡하고 값비싼 진주..
크루즈의 밤 일정은 예상했던대로 조용했다. 친절한 가이드는 우리에게 삼십 여 분의 샤워할 시간을 줬다. 그리고 스피링롤을 직접 만들어 먹고 저녁을 먹은 후 원하는 사람은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나와 D는 번갈아 씻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더운 것보단 훨씬 낫지만, 바람을 많이 맞다보니 훨씬 더 피로해지는 것 같았다. 샤워를 일찍 끝내고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맨 위 갑판 선 베드에 잠시 누워있었다. 엄청난 수의 별을 기대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미리 올라와 있던 사람들은 이 순간이 아주 좋다는 대화를 나눴다. 다들 친절했고 친화적이었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이 간섭하지도 않았다. 배는 한 군데 닻을 내리고 정박해 바람에 따라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았다. 멀미는 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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