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는데 머리가 좀 아팠다. D가 "7시 35분이야!"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처음에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7시 35분이면 이른 거 아닌가? 우리가 나갈 시각은 정오가 아니었나? 그러나 곧바로 하롱베이 투어를 시작하는 밴이 8시에 우리를 픽업하러 오기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짐도 제대로 안 싸뒀는데 끔찍한 일이었다. D는 머리를 감고 그 비눗물로 그대로 샤워를 했다고 하고, 나는 그나마 제대로 샴푸를 하고 샤워를 했다. D가 먼저 내려가고, 나는 마무리를 하는데 방으로 전화가 왔다. 8시 5분이었다. 라오스에서는 약속 시각에서 기본적으로 20분은 늦게 오고는 했는데, 베트남은 칼 같다. 나는 배낭을 맨 채 뭐 빠트린 게 없나 방안을 훑어보고는 황급히 로비로 내려왔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하노이의 기온은 삼십 도 초반을 넘지 않았는데 비엔티안의 더위가 우리를 따라온 모양이다. 오늘은 삼십 도 중반에 습도도 높았다. 체감온도를 확인해 보니 무려 사십이 도. 습도는 64%다. 그냥 걷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우리만 유난을 떠는 건 아닌 모양인지 여행자들은 물론 베트남 사람들도 아주 지쳐보였다. 딱히 인사할 거리가 없을 때, 그들은 오늘 너무 덥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하긴 열 번 반복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살인적인 날씨이긴 했으니까. (체감 상으론 이번 여행 중 가장 더운 날이었다.) 그리하여 이 끔찍했던 날의 기록을 빠르게 쓰고자 한다. 떠올리기만 해도 땀이 나려하니까 말이다. 호텔에선 아침부터 물이 나오지 않아 머리를 감다 말고 욕실에서 튀어나와야..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짐을 찾고 환전을 하는데 환전소 여자가 D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D가 한국이라고 대답하며 왜 궁금했냐고 되묻자 여자는 웃으면서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뒤에서 백 달러 짜리 지폐를 찾느라 끙끙대는 와중에 얼핏 그 단어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하노이 시내까지 나를 졸졸 따라와 씨앗이 되었다. 내가 여행 중에 풍경 사진보다 인물 사진을 많이 찍고 더 많은 사람과 만나보려고 애쓴 이유가 그렇게 단순한 동기에 있었다. 호기심. 다른 삶에 대한 궁금증. 일상이라는 같은 단어 아래있지만, 우리의 삶은 서로 다르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정치, 경제 체제가 다르다. 도시도 다르고, 그속의 교통 수단도 다르며, 음식과 술, 돈을 ..
비엔티안 왓따이 공항은 예상했던 대로 규모가 작았다. 많은 한국 분들이 하노이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을 전송하는 라오인 가족도 있었다. 그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포옹으로 이모 쯤 되는 여자를 보냈다. 그녀는 아마 하노이에 사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면세점에서 미니어처 위스키와 담배 한 보루를 샀다. 갑자기 문명 세계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받은 건 비행기에 올라서다. 우리는 그나마 저렴한 베트남 항공을 선택했는데, 듣던 대로 출고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좋은 기종이었다. 베트남 전통 의상을 개량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돌아다니고, 짐칸 아래는 모니터도 달려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리에게 비상구 자리를 배정해 준 카운터 직원에게 감사했다. 비지니스 ..
"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 unknown. Benoni 카페의 바 뒤에는 커다란 분필 글씨로 그렇게 써 있었다. 우리가 아직 괜찮지 않은 건,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건, 아직 우리의 여행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정말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을 상상하는 건 슬픈 일이다. 비엔티안에서 하노이로 넘어가는 날에 우리가, 아니 특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카페에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던 것밖에 없다. 약 다섯 시간 반을 카페에 앉아 있었다. 쓰고 읽다가 지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해도 시간이 남았다. 좀이 쑤시..
비엔티안에서의 낮 산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길 것 같지도 않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려 했던 이유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비엔티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라오스를 여행하기 위해 공항을 이용하거나(공항이 시내 안에 있다. 여행자 거리에서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달리면 십오 분 정도 걸린다.) 여행자 거리에서 커피나 베이커리, 꽤 근사한 식사를 즐기거나 아니면 그냥 걸어다니며 메콩 강 건너편으로 태국 땅을 구경하거나 가끔 마음이 동하면 라이브 뮤직을 하는 펍이나 나이트 클럽에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거나. 이 정도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조심스레 그건 오산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외국 여행자들의 블로그를 봐도 대부..
네 시간 정도를 달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뭐, 이제는 너무 익숙한 일이지만, 비엔티안 시내는 전혀 가깝지 않았다. 우리는 또 툭툭이를 타야 할 운명이었다. 도대체 왜 터미널이 시내에서 가깝지 않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툭툭이나 승합 차량을 위해 일부러 터미널이 멀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공생 관계인 것이다. 방비엥에서 비엔티안까지 오는 VIP 버스가 한 사람에 4만 낍이었는데, 비엔티안 버스 터미널에서 시내로 가는 벽도 없는 승합차량은 한 사람에 2만 낍이었다. 한화로 하면 큰 돈이 아닌 게 분명하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요금 체계가 아닌가. 툭툭이가 모든 시내 교통 수단의 먹이사슬 최상층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
우리가 오전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일어나 방갈로에서 제공하는 네스카페 믹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차례대로 샤워를 한 후 차례대로 짐을 꾸렸다. 이제 내 45리터짜리 배낭에 짐을 쑤셔넣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무언갈 버리지도 않았는데 배낭은 점점 홀쭉해지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 무언갈 잃어버렸음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기념적인 날이다. 우리의 여행이 이십 일째를 맞았고, 일주일만에 방비엥을 떠나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으로 향한다. 우린 일부러 버스 시간도 느즈막히 잡았다. 짐을 다 싸고도 시간이 남아 어제 사둔 컵라면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다. 그리고는 커피와 와이파이를 할 수 있는 오두막에 앉아 한 시간을 정오..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나는 혼자 여행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나는 속박을 원하고, 또 원한다.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았을 때, 나는 진정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최고의 여행 친구와 함께하기 때문에 나는 더 성장할 수가 없다. 그것이 정답이다. 나는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그냥 갈림길에 주저 앉는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또 조금은 바뀌어있겠지만, 끝없이 조급해 했던 이유는 그 폭의 미미함 때문이다. 나를 극으로 몰아붙이고, 떠나온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보며 그리워할 때, 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는 과정은 당신의 예상보다 훨씬 슬펐다. 왜냐하면, 내가 또 이런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시간과 수없이 많은 노력..
방비엥의 마지막 날, 무엇을 했을까. 아침에 옮겨 둔 방갈로에서 샤워를 했다. 해먹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소떼가 지나가는 걸 보았다. 사람들이 여전히 강변에서 물놀이를 하며 카약킹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퍼붓는 걸 보았다. 이곳이 이전에 이 박을 했던 방갈로보다 훨씬 싸고 좋다는 걸 알았다. 방갈로가 둘러싼 정원에 서면 보이는 절벽이 새삼 웅장하다는 것과, 가끔 염소 몇 마리가 이곳으로 와 풀을 뜯고 간다는 걸 알았다. 아고다에서 예약하면 직접 예약하는 것보다 좋은 방을 줄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하늘을 보았다. 열기구를 보았다. 오른쪽 저 멀리에선 여전히 음악 소리가 울리고 누군가 쉬지 않고 마이크로 뭔가를 소리쳤다. 바람이 불었다. 글을 썼다. 방비엥에서의 마지막 날임을 실감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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