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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교에서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려면 적잖이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성을 머리 위에 얹은 흐라트차니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다. 그다지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워낙 시선을 빼앗는 장면이 많아 앞만 보고 걸을 순 없다. 빙빙 돌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미로가 있달까.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을수록 도시가 자세를 낮추더니, 마침내 색 바랜 적갈색 지붕을 우리의 발밑에 내려놓는다. 군데군데 눈이 덮여 배색이 더 멋스러웠는데, 언뜻 보면 붉은 빵 위에 파우더를 뿌려놓은 것 같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어찌 프라하 시내의 전경뿐이겠냐만은 앞으로도 겨울 여행을 고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여기서이다. 점점 성이 가까워진다. 새삼스레 뒤를 돌아보자 지금껏 걸어온 길이 건물 사이로 드문드문하다.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즈막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어젯밤에 아껴둔(?) 카를교로 향했다. 밤중에 들렀던 구시가지 광장은 바베큐 냄새로 가득했는데 과연 한쪽에선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장작불 위를 구르고 있었다. 녀석에겐 안된 일이지만 시각과 후각 모든 면에서 이보다 더 군침 돌게 하는 장면이 없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덕분에 결국 지갑을 열진 않았지만.

연기부터 꼭 먹어줘야만 할 것 같은 냄새를 풍긴다.

  전날 우리를 즐겁게 했던 활기찬 분위기도 여전하여 사람 보는 재미가 더해졌다. 독특한 분장과 의상을 입은 악단은 오늘도 광장과 프라하 성을 오가면서 신명을 돋웠다. 유럽인들이야 대체로 이방인에게 미소를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이들은 특히 눈길과 웃음, 카메라 렌즈에 관대했다. 도시 전체를 무대 삼은 행진과 합주가 익살스런 무리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모양이었다. 우리도 미소 한 점이면 그 문을 통해 마음껏 축제의 한가운데로 드나들 여지를 얻었다. 이 작은 근육의 움직임이 어떤 말보다 만능이라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서로 다른 복장, 서로 다른 분장, 모두 같은 미소.

  또한 우리의 정서를 물결치게 하는 거리의 예술가들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사람들은 거리의 악사를 인상 깊어할지 몰라도 나에겐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더 인상적이었다. 하늘이 흐려서일까? 도시는 이곳저곳에서 리드미컬한 음악 소리를 울리며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길모퉁이와 가게 한 편에 가만히 놓인 수채화는 한 없이 차분했고 그러다 못해 우울했다. 축제의 흥겨움이 가리고 있던, 내가 상상해오던 프라하의 모습이 바로 캔버스 안에 담겨 있었다. 비로 젖은 거리, 옅은 안개를 감은 하늘, 걸음이 늦어 붓에 사로잡힌 사람들. 인상주의 화풍을 떠올리게 하는 빛의 표현과 - 젖은 도로 위에 반들거리는 그 모호한 춤사위와 - 균일하지 않은 채색과 성긴 외곽선은 그저 관광객들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기념엽서의 수준이 아니었다. 캔버스엔 생략과 과장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받는 진실한 느낌 역시 실제를 생략하고 과장하는 과정에서 - 이 둘은 항상 동시에 일어난다 - 얻어진 결과물이다.  100장의 사진과 100분의 동영상을 찍는다 해도 마음에 드는 한 장의 그림만큼 자신이 느낀 도시의 이미지를 충실히 담아내진 못하는 것이다.

프라하의 그림들.

  잠시 시간을 빠르게 감아 프라하 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던 순간으로 넘어가자. 꼭 여행이란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낯선 곳에 가면 그곳에 전반적으로 어려 있는 기분과 기운, 모종의 느낌을 자신 안에 담을 필요가 있다. 여기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직접 그 안에서 느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느끼는 방법이다. 그리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흐라트차니 언덕에선 후자의 방법을 택할 수 있다. 나로선 인공적으로 세워진 건축물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보단 고도는 낮을지 몰라도 자연적으로 솟은 지형 위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편이 좋다. 파리를 예로 들자면 에펠탑 전망대보다 몽마르트 언덕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편이 낫고(개선문 위에서 본 샹제리제의 야경은 예외로 하고 싶지만), 서울로 치자면 N 서울타워보단 낙산공원에 올라 야경을 보는 게 좋다. 높은 곳이 시야는 훤하게 뚫릴지 모르지만, 땅을 밟고 서있어야 눈에 보이는 풍경과 교집합에 속해있는 기분이 든다. 너무 낮지도, 너무 높지도 않아 전체를 관망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진 않은 느낌이다. 그러니 흐라트차니 언덕에서 불과 한 시간 반 전까지 내가 걸어 다니던 길을 본다는 행위는, 그때 어떤 감상이 나를 사로잡았는지를 떠올림과 동시에 앞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도시의 분위기를 포착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궁리하는 반성이란 덕목의 번외편 - 훨씬 쉽고 즐거운 - 같았다.

한없이 흐린 날의 프라하.

  물론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까진 갈 필요도 없을 만큼 시내를 내려다보는 시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칙칙하게 가라앉은 흐린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프라하의 전경은 마음을 끌었다. 불규칙한 형태로 들어선 건물들은 제 그림자로 좁은 골목을 가리고 있었다. 행인도 적었다. 지금이 축제 중이라는 걸 모르게 하고 싶어 하는 양, 사방은 고요했다. 어딜 보아도 바쁘게 움직이는 사물은 하나도 없었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던가. 그래서 괜시리 마음이 급해졌던가. 그런 나에게 이 도시가 가르쳐 준 건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안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블타바 강처럼 느리게 흐르는 도시에서 홀로 바쁜 척을 하며 유난을 떨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천천히, 천천히.

Canon A-1 + 50mm
sup
eria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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