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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프라하 성을 오르던 순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명소로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로, 카를교에서 바라본 자태를 떠올린다면 누구나 그 거대한 성곽이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을 호기심이 - 저 그림 같은 풍경 속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숨어있을까? - 이제 막 충족될 찰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지에서의 기대는 곧잘 깨어질 위험에 처하는 위태로운 존재다. 이 길의 끝에서 프라하 성도 우리의 기대에 무관심한 곳이었단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매번 상처 받으면서도 다시 사랑에 빠지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로선 매번 새로운 기대를 잉태하는 것 역시 멈출 도리가 없다.

프라하 성으로 들어가자.

  입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두가 거리를 비우고 여기로 몰려든 모양이었다. 정문과 정원을 지나자 높은 성벽에 안기는 기분이 들었다. 길은 좁고 건물은 높았다. 특히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성 비트 성당은 표준 렌즈로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고, 또한 사방 어디로도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얼마나 멀리 떨어져야 표준화각에 모두 담을 수 있느냐로 건물의 크기를 가늠하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다). 더 높이, 더 웅장하게 건축물을 쌓고자 했던 고딕 양식의 욕망이 프라하 성을 통해서도 불거진 셈이다.

성 비트 성당.

  프라하 성에서 파는 입장권은 등급(?)마다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서로 다른 패키지 형식이다. 가이드북에는 성 비트 성당 역시 입장권이 필요하다고 표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아무 것도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 건지 책이 잘못된 건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잘못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바로 들어갈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행의 마지막까지 성당을 방문하는 셈이다. 신앙도, 건축과 종교에 대한 지식도 없는 나로서는 지금껏 찾았던 모든 성당들이 서로 뒤엉켜 인식될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 누가 짓기 시작했으며 건축 양식은 무엇인가. 어느 사도의 이름을 따왔고, 혹여 놓치지 말아야 할 조각상이나 회화, 또는 벽화가 있는가. 무엇보다 비종교인인 나는 이곳에서 어떤 정취를 느끼는가.

화려한 내부.

 종교는 십 수세기 동안 유럽 정신의 버팀목이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라나게 한 자양분이었다. 때로는 그 자체로 꽃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없다면, 못해도 그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라도 없다면 유럽 문화의 많은 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다. 급하게 떠나게 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그 점이었다. 가이드북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디테일한 여행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아는 것만큼 느낄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떠나기만 한다고 '그곳'이 우리를 인도해 줄 리는 없다. 여행을 위하여 우리는 항공료와 숙박비 외에 우리의 관심까지 지불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늘로, 하늘로 솟으려는 고딕 양식의 특징이 엿보인다.

  그런고로, 피폐해진 샘에 새로 물고기를 분양하듯 성 비트 성당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처음으로 건축된 건 더 오래됐고(약 10세기경인 듯하다), 지금의 모습대로 탈바꿈을 시작한지도 700여년이나 흐른 성당이다. 하지만 내부의 장식은 그만큼의 세월과는 무관해 보인다. 스테인드글라스만 하더라도 '은은하다', '영롱하다' 따위의 형용사와는 거리를 두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유리의 색은 채도가 높고, 밑그림을 이룬 납선은 상업용 일러스트처럼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 뿐만 아니라 많은 조각과 부조, 장식들은 물질로 영성을 기르려는 듯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품에 안은 하나님의 모습도, 조각가의 손에 의해 부피와 무게를 지닌 육체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매우 감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쯤 되니 체코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 성당은 그저 신전의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니지 싶었다. 여기에 모인 많은 것들이 이 나라 예술가들의 작품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곳을 체코 예술의 한 귀퉁이를 들출 수 있는 종합지(綜合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이 종교는 유럽 문화의 꽃이자, 동시에 그럴싸한 소재였으니 말이다.

성 비트 성당의 작품들.

   비트 성당 이후로는 구왕궁과 성 이지 성당, 황금 소로를 볼 수 있는 입장권을 사서 다녔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던 구왕궁을 지나 - 덤덤했다. - 콘서트 홀로도 쓰인다는 성 이지 성당을 거친 다음 - 출구에 있던 거대한 비석은 흥미로웠다. - 성벽을 따라 걸었다.
  길을 통째로 관광지로 삼은 황금소로는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걸 좋아하는 내 취향에 잘 어울렸다. 온통 기념품 가게라는 게 아쉽긴 했으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짧은 의식만으로도 시내에 널린 여타 매장들과는 둘러보는 맛이 달랐다. 마음대로 몸을 뻗을 수 없는 어른들보단 아이들의 눈높이에 잘 맞는 곳이 아닐까. 또, 여기엔 프란츠 카프카가 머물며 집필을 했었다는 작업실도 있다. 부라노 섬에서 보았던 빛깔과는 조금 다른 - 흐린 날씨를 머금어 - 푸른색 벽의 집이었다. 한 쪽에는 그의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던 '변신'의 작가를 표현한 것 치고는 다소 앙증맞게 보이는 글꼴이었다.

황금 소로.

  황금소로를 지나면 그와 완전히 대비되는 이미지의 지하 감옥을 만날 수 있는데 죄수를 고문했던 고문기구들이 그대로 널려 있다. 분명 감성적인 의도를 갖고 벽에 입혔을 하늘색, 다홍색 칠과 인간을 찌르고 할퀴었을 날카롭고 뾰족한 쇳덩이들이 불과 몇 미터 안에 공존하는 셈이다. 이런 아이러니에도 안심할 수 있는 건 그 모든 것들이 과거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벌어졌을 모든 아름답고 끔찍한 일들은 지금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안전하게 감옥을 나와 계단을 내려갈 수 있다. 철창 너머로 보이는 이들도 성을 경계하던 사슬을 찬 경비병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관광객일 뿐이다.

직감적으로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느껴지지만, 깊이 알고 싶지는 않다.

  길은 성을 내려가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성곽 안은 대체적으로 멀리서 바라볼 때 품었던 기대와는 사뭇 달랐는데, 이곳을 그저 프라하의 상징으로만 기억한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프라하에 왔다면 이곳을 꼭 한 번 들러봐야 마땅하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스크린 앞에 앉아 디즈니 성 위로 폭죽이 터지는 걸 보며 그들이 초대하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하듯, 프라하 성도 프라하에 처음으로 당도하는 이들에게 이 도시에 대한 동경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나에겐) 프라하성은 제 안에 매력을 담기보단 그런 상징성을 띄는데 더 충실한 곳이라고 느껴졌다.

철창 너머로.


핑크색 캡션 사진은 fujifilm F50fd으로
푸른색 캡션 사진은 Canon A-1 + superia 200으로 촬영했습니다.
F50fd 사진은 필름과 느낌을 맞추기 위해 크롭 및 보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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