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 그것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다 읽은 날짜를 적어두곤 한다. 한해의 마지막 즈음에 목록을 훑어보면 그해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던 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떠오른다. 책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일은 즐겁다. 몇 개월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줄창 읽었던 시기는 당시 내가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작가들은 나를 철저하게 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롯데리아에 앉아 반숙 계란 버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늦잠을 잤고, 덕분에 아침도 먹지 못했다. 세상은 심심한 모양인지 때때로 빙글빙글 돌았다. 해도 거의 중천에 떠 있었지만, 내 눈엔 새벽이 막 지난 것처럼 거리가 푸른빛으로 코팅돼 있었다. 여행 첫날의 숙취가 떠올랐다. 도대체 인간이란 학습할 줄 모르는 동물인가 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좀 자다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나 자신도 웃..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은 달콤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방을 복제하는 커다란 집에 모여 어울렸고, 매일 밤 새로운 손님을 맞아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희망자들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그곳에는 꿈 밖에서 알던 사람, 꿈속에서 알던 사람들이 전부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이나 사실 생면부지가 아닌 이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누군가는 방 하나를 꽉 채운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밤이 깊었고, 나는 취하고 싶었다. 이 도시에서 멋지게 취하는 것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다. 스스키노 거리에 갔다. 가장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라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술집을 찾아 들어가는 데는 홀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제대로 변명하자면 스스키노에는 혼자 취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앞을 가로막았고, 뒷골목..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찍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는 한다. 멋진 풍경 사진은 그만한 장비를 갖추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나에게 남은 건 그냥 스쳐 가기 일쑤인 장면뿐이다. 스냅 사진의 가치는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의 그 장면과 그 사람을 포착할 행운은 그 순간에 있던 사람만 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스냅 사진을..
삿포로에 가서 뭘 하려는 거냐는 질문에 TV 탑 앞 오도리 공원에서 열리는 화이트 일루미네이션을 보려 한다고 대답하고는 했다. 그 대답 이면에는 눈이 잔뜩 쌓인 풍경까지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어제 오지 않은 눈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리고 집에 돌아와 여행기를 쓰다 보면, 쉽게 잊는 것이 있다. 왜 그곳에 가야만 했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했는지 단 한 줄이라도 적어둔 여행 ‘동기’가 ..
삿포로에 오기 전에 영화 「러브레터」를 다시 보려고 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게 스무 살 때였으니 십 년도 넘게 흘렀다. 좋아하는 영화는 반드시 몇 번이고 다시 보기 때문에 그 영화가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난 오타루에 관해 아는 것도 그곳에 기대하는 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배경이 된 영화라도 보지 않으면 기차에 올라야 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여행은 그 도시에 다시 갔을 때를 대비한 예행연습이라구요. 애인 몰래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요? 가슴에 도장 쾅 찍은 도시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서 다른 도시를 그리워하다니요. 욕심이 지나친 걸 수도 있어요. 못난 환상에 빠진 걸 수도 있구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샹젤리제 거리 기념품 가게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 것 같은 장식품 하나에도 그곳에..
작은 소동이 끝난 후 내가 내릴 차례가 왔다. 아침부터 모이와야마 전망대에 가는 길이었다. 이곳은 보통 야경을 보기 위해 찾는 곳이지만, 일정상 아침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밤 추위를 한 번 겪고 나니 해가 지고 나서 높은 곳에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햇볕의 지원을 받아도 산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같은 정류장에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앞서 걷던 할머니 한 분을 부러 따랐다. 그분 외엔 돌아다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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