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나는 롯데리아에 앉아 반숙 계란 버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늦잠을 잤고, 덕분에 아침도 먹지 못했다. 세상은 심심한 모양인지 때때로 빙글빙글 돌았다. 해도 거의 중천에 떠 있었지만, 내 눈엔 새벽이 막 지난 것처럼 거리가 푸른빛으로 코팅돼 있었다. 여행 첫날의 숙취가 떠올랐다. 도대체 인간이란 학습할 줄 모르는 동물인가 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좀 자다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나 자신도 웃을 수 없는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숙취를 해소한답시고 햄버거를 먹는 버릇이 있다. 고기에 야채, 빵까지 다 들어있으니 몸에 좋지는 않을지언정 영양소 구색은 다 갖췄다고 믿어서다. 특히 햄버거엔 리코펜이 함유된 토마토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토마토가 없으면 최소한 토마토케첩이라도 들어있다. 서양에는 “하루 한 개의 사과는 의사와 멀어지게 한다.”라는 속담과 “토마토가 빨갛게 익을수록 의사 얼굴은 파랗게 질린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사과는 의사를 (아마도) 실망스럽게 하는 데 그치지만, 토마토는 그들의 생존에 위협을 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음식인 셈이다. 그러니 햄버거라고 마냥 몸에 나쁜 것만은…. 그런데 반숙 계란 버거 안에는 토마토는커녕 토마토케첩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포장을 반쯤 벗기고 잠시 그대로 앉아있었다. 괜찮다. 나는 반숙 계란을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일본이 원조인 롯데리아이니만큼 한국 매장보다 더 맛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실제로 그랬다. 사실 맛보다 더 놀라웠던 건 패스트푸드 매장 안에 버젓이 들어선 흡연실이었다. 거기서 사람들은 햄버거를 먹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국에선 밥상머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한데 말이다. 물론 일본 사람이라고 롯데리아 흡연실 안에서 어르신과 감자튀김을 풀어놓고 맞담배를 피우진 않겠지만, 문화의 차이는 기대도 하지 않은 사이에 허를 찌른다. 흡연 구역이 점점 줄어드는 서울에선 - 한국 전체로 확장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 그곳을 곧 멸종할 동물처럼 마이너한 문화의 영역으로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 - 삿포로로 한정하기엔 롯데리아는 너무 거대한 프랜차이즈다. - 에서 흡연은 아직 생활의 일부인 모양이다.















 호스이스스키노(農水すすきの) 역으로 걷던 길에 정오가 임박한 시각임에도 만취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친구들에게 매달려 가는 여자를 보았다. 그러고 보면 어제 아침에도 노면전차에서 저렇게 취한 청년을 만났다. 이곳은 생각보다 해 뜰 때까지 술잔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일본의 젊은 세대 중 불안한 미래를 포기하고 오직 현재를 즐기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이틀간 목격한 장면이 그 증거인 걸까? 역설적으로 그렇게 현재에 충실하기로 한 세대가 선배 세대보다 행복지수는 더 높다고 한다. 우리는 어떨까. 포기하긴 마찬가진데 그렇다고 더 행복해지지도 못한 불운한 주인공인 걸까? 아니면 이런 문제적인 젊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주기적으로 등장해 왔으므로 역사책 속에선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인 걸까? 어제 바에서 만난 청년 류가 왜 그렇게 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셨는지 나는 어림짐작한다.
 그러나 역설은 계속된다. 나도 지금 숙취에 시달리고 있고, 휴가랍시고 평일에 여행을 와 낯선 도시의 거리를 쏘다니고 있으며, 심지어 전날 술을 그렇게 마셨으면서도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삿포로 맥주 박물관이다. 그리고 이 일이 즐거운 것은 난 미래를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미래가 대세와 조금 다를 수도 있을 뿐. 사실 대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지만 말이다.
 호스이스스키노는 그러니까 청춘의 방황이 쓸고 지나간 뒤 생긴 크레이터처럼 황량한 역이었다. 입구에서 승강장까지 가는 통로는 깊고 어두웠으며 인적도 드물었다. 잿빛 타일 터널 안에 푸르딩딩한 전등이 졸면서 보초를 섰다. 그 총체적인 색깔은 어릴 때 보았던 오래된 지하철 역사를 떠올리게 했다. 전차가 들어서면 개찰구를 통과하기도 전에 퀴퀴한 바람이 계단을 타고 올라와 나를 한 번 휩쓸고는 지상으로 줄 달음질치던 곳을 말이다. 물론 삿포로의 지하철역에서 곰팡내는 나지 않았지만, 이곳의 시간이 어쩌다 이리 느리게 흘러왔는지는 궁금해진다. 아주 길고 긴 마라톤에 출전해서 느긋하게 완주만을 목적으로 뛰는 선수를, 이곳은 닮았다. 그리고 다시 그 모습은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반납하고 현재에 머물기로 한 젊은 세대의 초상과도 묘하게 겹치는 것이다.








 히가시구야쿠쇼마에(東区役所前)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자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아껴야 할 거라곤 습기에 약한 카메라 하나뿐이었다. 머리카락이나 겉옷이나 등에 진 가방은 잔비를 개의치 않았다. 맥주 박물관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단념이 주는 묘한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인지 우산이 없으니까 오히려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공원 옆에서 거대한 아파트 건물을 보았다. 좌우로 너무 넓은 나머지 복도에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하고도 몇 걸음 더 남을 지경이었다. 뛰는 도중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면 그것은 위험천만한 장애물 경주가 되리라…. 하지만 이 비정상적인 너비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빌딩의 색깔이었다. 흐린 하늘조차 하얀 여백으로 보이게 할 만큼 짙은 회색의 덩어리가 땅에서 불쑥 솟아있었다. 그것은 콘크리트의 악몽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다시 꾸고 싶은 악몽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파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일본의 젊은 세대가 앞날을 불투명하게 보기 시작한 출발선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직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삿포로 맥주 박물관 맞은편엔 꽤 근사한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이 모여있었다. 대조는 우리로 하여금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던 것들에 주목하게 한다. 저만의 작은 정원을 꾸미는 삶과 수십 세대와 함께 공원 하나를 공유하는 삶이 서로 지척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미래를 보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시각으로 미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곳은 결국 오늘이라는 같은 시간 속에 있었다.

 비가 그쳤을 때, 길 건너편에 거대한 붉은색 석조 건물이 나타났다. 북극성을 상징하는 붉은 별도 보였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가슴이 두근거릴지도 모르겠다. 그곳이 바로 삿포로 맥주 박물관이었다.













Canon EOS-M + 22mm / 50m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