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가기로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맛있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이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던 붉은 벽돌 건물은 내가 삿포로에 와서 봤던 모든 곳 중 가장 ‘관광지’답긴 했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전 일정 중 가장 공허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을 피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불명예의 자리엔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가 올랐다.) 유명한 맥주 박물관이라고 해서 주변 주택가와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공원 내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었다.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벌써 시 외곽에 닿은 듯했다..
책을 읽으면 그것의 제목과 저자, 그리고 다 읽은 날짜를 적어두곤 한다. 한해의 마지막 즈음에 목록을 훑어보면 그해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던 시기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떠오른다. 책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일은 즐겁다. 몇 개월 동안 한 작가의 책만 줄창 읽었던 시기는 당시 내가 어떤 골칫거리를 안고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작가들은 나를 철저하게 벽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정신에 세게 몇 대 얻어맞으면서도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다. 주제 사라마구, 알랭 드 보통, 버트런드 러셀과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연수,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밀란 쿤데라. 물론 여기에 다 적지 못한 다른 작가와 시인, 여행가들도 모두. 그..
나는 롯데리아에 앉아 반숙 계란 버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늦잠을 잤고, 덕분에 아침도 먹지 못했다. 세상은 심심한 모양인지 때때로 빙글빙글 돌았다. 해도 거의 중천에 떠 있었지만, 내 눈엔 새벽이 막 지난 것처럼 거리가 푸른빛으로 코팅돼 있었다. 여행 첫날의 숙취가 떠올랐다. 도대체 인간이란 학습할 줄 모르는 동물인가 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좀 자다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건 나 자신도 웃을 수 없는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숙취를 해소한답시고 햄버거를 먹는 버릇이 있다. 고기에 야채, 빵까지 다 들어있으니 몸에 좋지는 않을지언정 영양소 구색은 다 갖췄다고 믿어서다. 특히 햄버거엔 리코펜이 함유된 토마토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토마토가 없으면 최소한 토마토케첩이라도 들어..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은 달콤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방을 복제하는 커다란 집에 모여 어울렸고, 매일 밤 새로운 손님을 맞아 포옹과 악수를 나눴다. 그곳에 들어가려는 희망자들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그곳에는 꿈 밖에서 알던 사람, 꿈속에서 알던 사람들이 전부 있었다. 나는 생면부지이나 사실 생면부지가 아닌 이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누군가는 방 하나를 꽉 채운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의미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표정도 가물가물하지만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끝없이 생성되는 방 안에 가득했다. 흥미진진해 죽겠는데 페이지가 한참 남아 든든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단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술을 마셨다. 꿈에서 깰 시간이 되어도 이곳이 ..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찍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는 한다. 멋진 풍경 사진은 그만한 장비를 갖추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나에게 남은 건 그냥 스쳐 가기 일쑤인 장면뿐이다. 스냅 사진의 가치는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의 그 장면과 그 사람을 포착할 행운은 그 순간에 있던 사람만 누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스냅 사진을 즐겨 찍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다른 시선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선이 한 장의 사진에 특색을 부여하여 완성한다. 이때, 사진은 만들어가는 무엇이 아니다. 주어지는 무엇이다. 여행 중에는 깊든 얕든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때로 그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새에 렌즈 앞에 나타나 웃거나 손을 흔들거..
내겐 관람차를 탔던 기억이 없다. 한번은 올라봤을 법도 한데 너무 어렸을 때라 지워진 건지도 모른다. 그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시야가 점점 넓어지다 절정에 오르면 어떤 기분이 벅차오르는지 나는 모른다. 조심스레 지금에 와선 덤덤할 게 분명하리라 예측할 뿐이다. 이것이 한계라면 한계라 불러도 좋다. 감정을 움직이는 동력의 가짓수가 줄어드는 나이가 됐음은 분명하다. 굳은살처럼 덕지덕지 붙은 껍질은 마음의 바퀴를 뻑뻑하게 하고, 톱니가 맞물리지 않고 자꾸 엇나가게 한다.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고 일에 열중해도 그걸 다 긁어낼 도리가 없다. 그러기엔 더께가 쌓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때마다 대청소를 하듯 아예 떠나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관람차에 오르는 게..
모든 것이 놀랍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그건 두려움이기도 했다. 의지해야만 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고 그것들을 헤쳐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호기심은 망망대해처럼 고갈되지 않는 무엇은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터를 잡고 메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채워지고 줄어드는 희소 자원에 가까웠다. 아니, 차라리 호기심을 느끼는 대상이 몇 가지로 집중되었다 말하고 싶다. 나는 수원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우물 몇 개를 파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그마저도 서툰 솜씨였지만, 지층이 바뀔 때마다 놀랍고 두려운 순간이 있었기에 견딜 만은 했다. 다만 의지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맞잡은 손은 그때만큼 어지럽게 얽혀있지 않다. 샘 솟을 기약 없는 구덩이 안을 들여볼 때마다 이 속으로는 혼자서 들어갈 도리 외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한때 자전거가 몹시 갖고 싶었다. 겨울의 징조는 채 열 번도 타기도 전에 주차된 그대로 눈이며 비며 찬바람이며 다 두들겨 맞을 자전거를 상상하게 했다. 그래서 몇 번을 망설이고 몇 번을 접었다. 결국 자전거는 사지 못했다. 따뜻한 날이 오면 그때 사도 늦지 않다고, 그러니까 봄의 징조를 기다려 보자고 자신을 설득했다.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에 대한 희구로부터 여행은 비롯되는가 보다. 시작은 보잘것없는 거리, 예컨대 이런저런 술을 파는 대형 마트나 도시를 흐르는 냇가에 자리 잡은 한가로운 카페 따위로부터였다. 바구니에 장거리를 담아 달리면 그 바람이 날 멀리 데려가 줄 것만 같았다. 최소한 기분은 그럴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자전거가 아주 많이 다니는 도시가 뭉게뭉게 떠올랐고, 그 유유한 속도를 지켜보면 ..
아케이드에선 세월이 읽힌다. 최신 상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 구조만큼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에선 아케이드를 파사쥬라고 부르는데, 파리 같은 대도시에선 19세기 초부터 이 파사쥬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에는 산업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 화려하고 매혹적이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겠지만, 오늘날 지붕이 있는 상가는 흘러간 유행이나 다름없는 구조물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형태의 상가가 주로 재래시장으로 기능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바야흐로 백화점을 넘어선 대형 몰의 시대이니까.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로부터 온 형식이라는 데서 나는 본능적으로 아득한 그리움을 느끼는 게 분명하다. 삿포로의 다누키코지(狸小路) 상가도 아케이드다. 전체 길이 약 900미터,..
영하의 기온까진 아니었지만,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미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가슴에서 뭔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틀어막았다. 눈으로 채우고 싶어도 밤하늘은 미련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맑고 창백한 바람만 어둠 너머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 마음 안에 것들이 밖으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는지도 몰랐다. 겨울이 되면 마음이 허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날이 이 모양이니 거리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모두가 이 이상 초라해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인적이 드물어 더 추운 것 같고, 추워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줄어들고. 해가 뜰 때까지는 악순환이었다. 오히려 길가에 서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사람보다 흔했다. 낡고 두툼한 정장 차림의 택시 운전사들은 하염없..
- Total
- Today
- Yesterday
- 베짱이세실의 도서관
- To see more of the world
- 데일리 로지나 ♬ Daily Rosinha
- :: Back to the Mac
- Be a reader to be a leader!
- 좀좀이의 여행
- Jimiq :: Photography : Exhibit…
- 반짝반짝 빛나는 나레스★★
- 일상이 말을 걸다...
- S E A N J K
- Mimeo
- Imaginary part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전자책 이야기
- Sophisticated choice
- 토닥씨의 런던일기
- 언제나 방콕라이프처럼
- PaRfum DéliCat
- The Atelier of Biaan
- JUNGSEUNGMIN
- 꿈꾸는 아이
- hohoho~
- Write Bossanova,
- Connecting my passion and miss…
- Eun,LEE
- 밀란 쿤데라 아카이브
- 순간을 믿어요
- Margareta
- 라이카
- 미니룩스
- 여행
- 파리
- 50mm
- a-1
- Canon a-1
- 일본
- 책
- EOS M
- 트레블노트
- Portra 160
- 트래블노트
- 홍콩
- 수필
- 홋카이도
- 22mm
- 이탈리아
- 북해도
- 하와이
- 사운드트랙
- 이태리
- 주기
- 한주의기록
- 필름카메라
- 24mm
- 유럽
- 캐논
- 사진
- 음악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