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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케이드에선 세월이 읽힌다. 최신 상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 구조만큼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에선 아케이드를 파사쥬라고 부르는데, 파리 같은 대도시에선 19세기 초부터 이 파사쥬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에는 산업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 화려하고 매혹적이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겠지만, 오늘날 지붕이 있는 상가는 흘러간 유행이나 다름없는 구조물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형태의 상가가 주로 재래시장으로 기능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바야흐로 백화점을 넘어선 대형 몰의 시대이니까.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로부터 온 형식이라는 데서 나는 본능적으로 아득한 그리움을 느끼는 게 분명하다.
 삿포로의 다누키코지(狸小路) 상가도 아케이드다. 전체 길이 약 900미터, 일곱 블록에 걸쳐 이백 여개의 점포가 있는 이 상가는 삿포로에 왔다면 꼭 한 번 들러볼 만한 곳으로 이름났다. 내가 잡은 도미 인 호텔도 바로 이곳 안에 있었다. 워낙 행인이 많은 곳이라 삿포로 역에서 지하상가를 거쳐 이곳으로 올라왔을 때 나는 삿포로가 북적거리는 도시인 줄로만 알았다. 실상은 아니었으나 문을 나설 때마다 매번 착각에 빠지는 건 기분 좋은 오해였다.
 다누키코지는 한 블록만 조명이 다르다. 1쵸메부터 6쵸메까지 여섯 블록은 형광등의 하얀 불빛으로, 마지막 7쵸메는 백열등의 진한 오렌지빛으로 채워져 있다. 신기하게도 빛의 차이가 그 블록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백열등이 켜진 일곱 번째 거리에는 다른 블록보다 조용하고 개성적이며 아예 유행을 따르거나 아예 유행을 놓친 가게가 뒤섞여 있었다. 왜 한 곳만 조명을 달리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마음이 끌렸다.























 여행 내내 다누키코지로 즐겨 다녔다. 눈에 익을 정도로 자주 본 유리창안에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포즈로 앉아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여기서 왠지 모를 안락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건물 같은데 사실은 길이라는 역전도 좋았다. 일관성 없이 들어선 다양한 상점이 거리를 이루는 꼴을 보고 있으면 한 곳 한 곳 모두 방문하고 그중에서 단골집을 만들고 싶은 충동도 일어난다.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단골이 되어버린 곳도 있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일 사람이 있었으면 반드시 들어가고야 말았을 그런 곳들이.
 다누키코지 주변에도 볼거리가 많았다. 차도와 면한 거리는 상대적으로 어둡고 한적했지만, 매혹적인 냄새를 풍기는 곳이 끝없이 나타났다. 외진 데 터를 잡고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엔 맛봐야 마땅한 매력이 있을 것만 같았다. 돈과 시간이 부족해 모두 들르지 못한다는 현실에 애달팠다. 아, 그러나 이 도시의 시민이 된다고 해서 내가 이곳을 전부 섭렵할 수 있을까? 내가 사는 도시만 하더라도 나와 잘 들어맞으리라 예감하면서도 가보지 않은 곳이 얼마나 많던가.
 살면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이 이와 비슷하겠다. 어딘가에 자신을 더 잘 이해해 줄 존재가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도 물리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인연에는 한계가 있다. 완벽한 여행이 그런 것처럼 완벽한 사람을 만나기란 죄다 운명에 맡겨도 무방할 만큼 우리 능력 밖의 일이다. 이번 여행에선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장소든 사람이든 후회하지 않을 만큼 만나고 또 만나려고 애쓰는 게 부질없는 짓인지 그렇지 않은지. 어느 선에서 만족하고 어느 선에서 포기해야 현명한 처사일 것인지. 나는 왜 모조리 채우거나 모조리 비우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는지.
 다누키코지엔 여닫이문부터 아주 낡아 보이는 잡화점이 하나 있었다. 집에 돌아와 글을 쓰려고 찾아보다가 그냥 지나쳤던 그곳이 1902년에 문을 연 다누키코지 안에서 가장 오래된 상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의미 있는 곳과 마주쳤으나 그 의미를 알기 전까지 그곳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했다. 종이 한 장 차이나 다름없었다. 안달해도 알지 못했던 것들이 언젠가 허무하게 밝혀지는 날도 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내 의문에 대한 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


















Canon EOS-M + 22mm / 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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