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가 쓰는 디지털 카메라에 필름 카메라 단렌즈를 붙여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 화각은 뭔가 부족하다. 표준 화각 이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미 그런 렌즈가 있다. 그것도 세 알씩이나. 뷰파인더가 없기 때문에 수동 초점 맞추기가 쉽지 않겠지만, 어차피 본연의 자동 초점 기능도 시원찮으니 그 밥에 그 나물이겠거니 했다. 삿포로에 가서 뭘 보고 어딜 가야겠다는 공부도 제쳐놓고 인터넷 검색질을 했다. 과연 쓸 만하면서 가격도 만만한 렌즈 컨버터가 있었다. 삿포로의 양대 전자상가인 빅 카메라와 요도바시 카메라 중 후자 쪽이 세일 중이라 저렴하다는 정보까지 확보했다. 좋아, 이거다. 그래도 일본 여행인데 카메라 용품 하나 정도는 사야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오래된 렌즈를 캐리어에 던져 넣고 나는 삿포로에 왔다.
 하카타에서 이미 가본 적 있지만, 요도바시 카메라는 들어갈 때마다 놀랍다. 어릴 때 용산 전자상가에 자주 놀러 갔기 때문에 산더미 같은 전자제품엔 익숙하다 자부했는데 여기엔 훨씬 집약된 뭔가가 있다. 도쿄 아키하바라에 갔다간 혼이 쏙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플라스틱을 열에 달군 듯한 냄새를 맡자 학창 시절 생각도 나고 언 몸도 풀리는 기분이었다. 가끔 이 냄새에서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얼리 어댑터는커녕 이런저런 전자제품을 사들이는 편도 아닌데 해괴한 노릇이다. 다리 밑이 아니라 고물상이나 전파사 앞에서 주워온 아이인가 싶다.
 그리 붐비진 않았지만, 각자 자기가 관심 있는 매대에 코를 들이밀고 있는 이들을 보며 일본 사람들은 정말 전자 제품에 관심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고가의 제품을 사기에 앞서 그런 눈빛을 할 게 분명한데도 새삼 그들의 진지함에 자극을 받았다. 서점이나 재래시장에서 진지한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지만, 일본이니까 이런 곳도 나쁘지 않다. 나 역시 공연히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만져보다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며 카메라 코너로 옮겨갔다.










 대형 마트처럼 분류가 잘 되어 있어 여러 번 와 본 마냥 금세 내가 원하던 어댑터를 찾을 수 있었다. 테스트를 해보자 액정에 펼쳐지는 화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렌즈 자체는 50mm 표준 단렌즈였으나 크롭바디의 배율을 곱해 80mm 정도 나오는 모양이었다. 역시 처음 쓰는 화각이지만 아무래도 기존에 물려 쓰던 환산 화각 35mm보단 안정적이었다. 나는 넓게 보는 안목은 없는 것 같다는 이상한 결론과 함께 오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어가 짧아 망측한 표현을 써가며 어찌어찌 구매에 성공하는데 역시 인터내셔널한 매매에선 계산기가 만능이다. 처음엔 어댑터에 붙어 있는 가격표가 한국에서 보고 온 인터넷 가격과 달라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실제 계산 때는 똑같이 할인해 주더라. 사실 그래서 더 기뻤다. 기대와 좌절 후 결국 일이 이치에 맞게 돌아갈 때의 쾌감.
 요도바시 카메라의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비닐을 들고 곧바로 매장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그 건너편 건물 로비로 들어가 새것 아닌 새 렌즈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으리으리한 전시장 앞에서 이젠 팔리지도 않는 작은 녀석을 조물딱 거리기에 부끄러웠달까. 피사체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기엔 표준 화각이 제일인 것 같지만, 이 정도 준망원 역시 나쁘지 않았다. 노출도 잘 잡고, 셔터도 잘 눌렸다. 문제는 초점이었다. 당장 TV 탑으로 이동해 일루미네이션을 찍어야 하는데 LCD에 뜬 결과물만으로는 초점이 맞은 건지 안 맞은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새 렌즈의 새 화각을 만날 때마다 찾아오는 신세계의 흥분이 가라앉아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집에 돌아가 모니터에 까봤을 때 전부 엉망이면 어떻게 하지?
 서점과 꽃집이 들어선 로비에 앉아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안달하는 와중, 한 아이가 그런 내가 재미있었나 보다.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는 어머니 주위를 맴돌다 내 앞에 서서 손을 막 흔든다. 방해하고 싶었다고 하기에도 뭣하고 카메라에 찍히길 바랐다고 하기에도 뭣한, 그냥 사진 속에 자기 손이 나오길 바라는 어린아이 다운 장난이었다. 계속 사진에 집중하고 있어서 처음엔 그러는지도 몰랐다. 평소에 쓰던 화각이라면 화면에 걸렸겠지만, 준망원인 지금은 보이는 폭이 더 좁으니까. 열심히 애를 썼는데 본의 아니게 그 노력을 무시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래서 얼른 한 장을 찍어줬다. 녀석, 그러고 나서 내가 다시 렌즈를 겨누자 이번엔 찍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장난을 시작한다. 어머니 뒤에 숨어 손만 내밀고 논다. 나도 같이 놀다 보니 이내 초점 연습이고 뭐고 다 잊어버렸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삿포로에서 돌아온 지금까지도 내 디지털카메라의 바디캡은 이 수동 렌즈가 도맡고 있다. 렌즈에서 조리개와 초점을 맞추는 재미도 오랜만에 느껴보고, 사진도 마음에 든다. 오래된 렌즈라 선예도가 높지 않고, 초점이 빛나간 영역엔 (정말 말도 안 되는 표현이지만) 필름 그레인 같은 질감이 묻어나온다. 뭐 그렇다고 사진이 획기적으로 좋아졌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예전처럼 사진 찍기가 재미있어졌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철로 만든 투박한 수동 렌즈와 하얀색 알루미늄 몸체의 조합도 보기에 흐뭇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만남을 디지로그라 하던가. 이 정도면 종자 모를 합성어라도 기꺼이 써줄 만하겠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상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찍어보라고 카메라를 넘겨주자 오히려 자동 렌즈를 물렸을 때보다 잘 찍는다는 거다. 심지어 나보다 초점도 정확히 맞춘다. 내 눈이 침침해서라고 변명은 하지만, 내심 기분은 좋다. 카메라를 별로 다뤄보지 않은 사람도 찰칵찰칵 잘 찍는 그 넉넉함이 좋다. 특히 드디어 남들이 내 사진을 잘 찍어주기 시작해서, 그 이유도 덧붙여 좋다.



Canon EOS-M + 50m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