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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묵은 호텔은 다누키코지 6쵸메에 위치한 도미 인 삿포로 아넥스(Dormy Inn Sapporo Annex)였다. 해산물이 포함된 뷔페식 아침 식사에 대중탕까지 딸려있는 곳인데 가격은 부담 없이 저렴했다. 십 층에 있는 싱글룸은 예상했던 대로 작았지만, 냉난방 시설도 완벽했고 공기 청정기 또한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건물 안에서 입기 좋은 실내복을 제공하고 로비엔 공용 제빙기까지 있으니 숙박비를 낸 건 내 쪽인데 오히려 내가 고마워지는 역설이 일어났다. 이런 곳에서 한 달만 딱 살아보는 건 어떨까. 평소 욕탕이나 사우나를 좋아하진 않지만, 매일 들어가 줄 수도 있는데. 책상에 만년필과 공책을 배치하고 그 공백을 매일 같이 채워나갈 수 있을 텐데. 마침 장기 투숙자를 위한 가격 안내표가 붙어 있었다. 하루씩이면 저렴해 보여도 한 달로 치면 역시 만만치 않다. 꿈은 꿈이오, 상상은 상상이라. 여기엔 돈이 들지 않아 다행이다.
 짐을 풀고 가만히 앉아 방 크기를 헤아리는데 기운이 없었다. 아직 숙취가 가시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다. 해장할 뭔가가 필요했다. 나는 간단히 동선을 짰다. 우선 저녁을 먹고 요도바시 카메라에 가서 카메라 용품을 하나 산 후 삿포로 TV 탑에 올라가 야경을 보자. 귀가 중엔 편의점에 들러 술을 사 오자. 그리고 공용 제빙기에서 얼음을 퍼 와 술잔을 기울이며 글을 쓰자. 아침엔 일찍 일어나 꼭 조식을 먹도록 하자. 짐을 챙겨 분연히 일어났다. 예사로운 계획이 전혀 예사롭지 않았다. 모르는 도시가 이 방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했다.


















 삿포로 역 주변 라면 잘하기로 소문난 집을 찾아갈까 했지만, 호텔이 일곱 개 블록에 걸친 상가에 있다 보니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라면집이 발에 챘다. 일본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한국 분식집에서 끓여주는 봉지 라면도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는 편이다. 라면은 뭐니뭐니해도 내가 끓인 라면이 제일 맛있다. 라면이란 음식이 거의 그렇다.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가 끓인 라면을 최고로 친다. 섣불리 라면집을 차리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밥은 먹어야 한다. 동네 아저씨들이 갈 법한 작고 꾀죄죄한 라면집 앞을 서성이다가 발길을 돌려 깨끗하고 널찍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닥 선호하지 않은 음식에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카운터 자리가 반가웠다. 혼자 벽이나 주방을 맞대고 맥주를 마시며 밥을 먹는 게 이 나라 문화를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따라 하고 싶은 것은 이 나라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저렴하게 외식을 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인 용이나 사인 용 탁자는 부담스럽다. 반드시 벽에 머리를 박고 앉아야 한다. 어린아이들도 그러기 일쑨데, 잘 모르는 걸 흉내 낼 땐 저 나름의 기준을 고집하며 우기게 되는 법이다. 젓가락질을 못 하는 아이가 쥐기는 두 자루 다 한 손에 쥐어야 한다고 떼를 쓰다 국이며 반찬 그릇이며 다 엎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부끄러워할 일만은 아니다. 그렇게라도 해봐야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최소한 난 앞으로 나흘 동안 라멘은 이 한 끼로 충분하겠다며 재차 취향 확인도 했다.



















 힘이 나서 머릿속 지도를 따라 걷는다. 나는 기운을 차렸지만, 밤공기는 차다. 천장이 있는 상가라고 서늘한 공기까지 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어둡다. 시계를 보면 오후 일곱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거리는 이미 한밤중이다. 행인은 모두 집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실컷 저녁 시간을 보내다 두세 시간 후의 세상에서 건너온 사람처럼 걸었다. 시간을 인지하는 기관이 망가진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으나 도로 시계를 보면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다. 이 도시가 밤을 빨리 부르는 도시다. 그리고 그걸 이기려 하기보다 거기에 젖어드는 편을 좋아하는 도시다.
 세상 전자제품은 모두 모인 요도바시 카메라에 들러 볼일을 보고 나오자 또 시간이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TV 탑으로 가기 위해 지하상가를 빠져나오면 다시 또 저만치 멀리 있던 적요한 밤이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 추위도 엄습했다. 그러면 나는 코트를 여미고 목도리를 세게 잡아당기는 손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거짓 없이 혼자였다. 연방 춥다고 혼잣말을 해도 미소는 지울 수 없었다. 아, 한 가지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눈이 내리는 거였다. 이 정도 기온에 이 정도 바람이면 한두 점이라도 흘렁이련만 하늘은 무심하게 맑았다. 눈만 내린다면 완벽하게 격리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게 무엇이 됐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성탄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나는 그 생각을 되풀이했다.
 삿포로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화이트 일루미네이션은 그런 어둠 속에서 환영처럼 떠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화려하진 않았다. TV 탑으로 올라가기 위해 오도리 공원 2쵸메까지 걷자 이곳은 하필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부터 열리는 뮌헨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로 황량했다. 화려한 무대를 쌓기까지 우리는 상자 더미와 케이블 뭉치와 뼈다귀 같은 지지대 따위를 봐야 한다. 북유럽의 오두막을 닮은 선물가게는 거진 비어 있었고, 그 안엔 한 독일 남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뭔가를 분류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 - 고작 오후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지만 - 일찍 문을 닫은 건 줄 알았다. 이렇게 캄캄한 행사장을 앞에 두고 야경을 본다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전망대에 오르려던 계획은 그렇게 다음 날로 미루었다. 물론 그 다음 날에도 한국에서 확인하고 온 크리스마스 마켓 시작 날짜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삿포로에 오기 전까지 난 이 도시를 눈과 빛에 연관 짓고는 했다. 이제 그 선입견을 교정해야 했다. 이곳을 일컬어 빛의 도시라 할 수 있는 기저엔 밤이 길다는 이유가 있었다. 차라리 밤의 도시라 불러도 좋겠다. 눈이 내린다면 눈 내린 밤의 도시라고. 사람 사이에도 오해가 풀리면 벽이 하나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다시 와도 겨울에 오고 싶었다. 이미 긴 밤과 그보다 더 긴 추위에 익숙해지고 말았으니. 그러고 보면 삿포로의 TV 탑은 파리의 에펠탑을 닮았다. 마이너한 축소판이랄까. 어쩌면 정말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를 세우려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들렀던 모든 도시엔 저마다 라벨이 붙어있는데, 송신탑의 유사성은 내가 앞으로 이 도시를 어떻게 분류할지에 대한 작은 힌트였던 것 같다.



















Canon EOS-M + 22mm / 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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