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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벽에 눈이 떠졌다. 창밖으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런던 근교의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젯밤 런던에 도착한 후 호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잠이 들었다. 선잠이 들지도 않았고 비행으로 말미암은 피로도 없었다. 이럴 땐 시차 적응이 빠른 체질에 참 감사하게 된다.
 
어울리지 않게 새벽 공기가 마시고 싶어졌다. 미로처럼 길고 복잡하며, 가끔 오븐 타이머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호텔 정문 앞엔 벌써 먹이를 잡아 온 새들이 식전 기도를 지저귀고 있었다. 기온이 낮지는 않은데 바람이 불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런던의 스산한 추위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 새벽부터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차들을 본다. 출근길인가 싶어 이네도 참 빡빡하게 사는구나 하는데 아, 오늘은 일요일이다. 휴일에 떠는 부지런은 대체로 즐거운 목적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들이를 위해 시내로, 또는 더욱 먼 외곽으로, 자동차 꼬리등에 부푼 기대를 달고 달리는 거겠지.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인데 나 역시 들뜨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런던의 일요일이다.


2.
 
아침엔 날이 흐렸다. 내심 런던의 안개까지 보고 싶었는데 그런 행운(다른 사람에게는 불운)은 없었고, 따뜻하게 입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춥기만 했다. 안내원은 우리를 템스 강 변에 데려다 놓았다. 건너편으로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강의 우안이었다. 국회의사당과 빅벤을 감상하기엔 바로 앞보다 이곳이 훨씬 낫다는 설명이었다.
 
강 한쪽을 차지한 신고딕 양식의 거대한 건축물은 이 도시가 우리가 떠나온 곳과는 보이는 것부터 다르다고 일러준다. 뾰족한 탑과 좁고 길쭉한 창문을 눈으로 좇으며 이 의사당이 중세 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낯설지언정 압도적인 감동은 없었다. 거리도 멀었거니와 흐린 날씨 탓에 건물의 윤곽이 선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상은 주로 셔터를 누르는 행위로 구체화됐다. 런던에 왔다는 증거를 남기려는 소란스러움 가운데 나 역시 하릴없이 필름을 소비했다. 그러면서 나중에라도 사진을 보며 천천히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일종의 보험을 든 셈인데, 집에 돌아와 사진을 펼쳐놓고 나면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한바탕 인증 작업이 몰아치고 나자 풍경은 급격히 단조로워졌다. 여기에 드라마를 부여한 건 간밤에 한 남자가 템스 강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뉴스였다. 사인은 알 수 없었지만 런던이라는 특정한 도시가 B급 영화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안개가 스며든 가스등 아래에서 누군가의 비위를 폭로하려던 정보원이 38구경 권총에 의해 쓰러지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보였으나 겨울이 다 물러가지 않은 황량한 템스 강은 자신이 삼킨 불운한 인물에 대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
   
하지만 강을 따라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와는 상관없이 도시의 트랙은 무심하게 돌아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템스 강 변의 산책로엔 사람이 많았다.

  안내책자는 사우스 뱅크부터 타워 브리지까지 이어지는 이 산책로를 일컬어 런던과 템스 강을 가장 재미있게 만날 수 있는 곳이라 추켜세우기도 했다. 나는 타워 브리지와 가까운 모어 런던 주변을 서성거렸다. 왼편으로는 벨파스트 호와 타워 브리지가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국회의사당과 비교하면 더욱) 우주선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시청사, 학사모를 반으로 쪼개놓은 것 같은 카페, 그리고 금속 원반처럼 매혹적인 야외 원형극장. 모어 런던에 집합한 건축물들은 템스 강의 예스러운 풍경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질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자재도 다르고 추구하는 이상도 다른 구조물들이 서로 배척하지 않는 이유는 남들보다 앞서 나가면서도 위트 덕분에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 나라의 문화, 그리고 예술의 힘이 아닐까 했다. 영국인들은 대영제국의 영광을 잊지 못해서인지 아직도 빅토리아 양식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혁신적이고 매끄러우면서 어딘가 장난기가 느껴지는 현대 건축물을 지을 때도 옛 영광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면 빙빙 돌아가는 타임머신에 탄 것 같았다.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하는 시민, 잔디 위를 산책하는 젊은 모녀, 가만히 앉아 관광객을 스케치하는 화가가 활동사진의 주인공이었다. 영사기에 걸어두고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공상에 빠지기 딱 좋은,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와 건물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강을 타고 넘어오는 자동차 타이어의 마찰 소리는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당신의 주말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4.

  주말을 고대하며 평일을 보내는 사람은 금요일 오후부터 가슴을 두드리는 기쁨을 두고 행복이라 말할 수 있겠다. 행복의 조건 중 지속시간이란 항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했다. 오 일간의 평일을 견뎌내는 것을 주말을 쟁취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라고 본다면, 주말에 느끼는 행복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임금을 받기 위한 노력을 유예받고 자의 반 타의 반 내비쳤던 속물근성을 거둬들 수 있다는 기대. 그래서 진정한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 우리는 종종 그런 희망을 품지 않는가.
 
그런데 날짜에 대한 감각이 급격히 떨어지는 여행자에게 평일과 주말의 구분은 모호하기만 하다. 매일 매일이 새롭고 매일 매일이 휴일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행자의 처지에선 현지인들 역시 주말을 기다리며 고된 한 주를 보냈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그들이 출근하면서 받았을 스트레스, 직장 상사가 주는 불쾌감, 대출 이자에 대한 걱정, 자식 농사를 망친 실망 따위를 상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공조는 위험하다. 자칫하다간 장롱에 남겨두고 온 내 삶의 짐이 불청객처럼 쫓아올지 모른다. 이곳은 내가 있던 곳보다 더 나은 곳이어야 한다는 희망도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완벽한 여행은 그 모든 위험을 피할 때야 누릴 수 있다.
 
여행에 관한 이런 환상은, 겉모습만 다를 뿐 평범한 삶은 어디서든 똑같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게 만든다.


5.
 
우중충한 장막이 걷히고 해가 번쩍 떠오르자 런던은 활기찬 도시가 되었다. 시민들은 관광객만큼이나 들뜬 표정으로 쇼핑센터와 카페, 식당을 들락날락거렸다. 이렇게 맑은 날이 흔치 않기 때문에 햇볕에뼈를 말리고자' 거리와 공원으로 쏟아져 나온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질감의 햇살은 적분홍색 벽돌을, 새파란 차양을, 잿빛 보도블록을 살살 달래 본래의 제 색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거리의 소음도 빛의 원통을 통과하며 더 맑게 울리는 것만 같으니, 나의 감각 자체가 위증을 할 정도로 찬란한 착각에 빠진 모양이었다. 축제가 있는 날도 아니고 중요한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도 아닌데 그저 화창한 주말이란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들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시민이었던 역사는 상관이 없다. 스트릭랜드가 진절머리를 치며 떠나고 홈즈가 동료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누빈 도시였다는 것도 상관이 없다. 여왕이 있으며, 왕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대중에게 다시없는 가십거리라는 사실 역시 상관이 없다. 이 독특하면서 음울하고, 절제하면서도 멋 부릴 줄 아는 도시의 주인들도 그냥 날씨가 좋아서 잔뜩 신이 나는 똑같은 사람이었다.
  축축한 바람과 무채색의 하늘이 가서 맑은 날이 왔다. 절망과 피로와 분노의 강에서 노를 저어 평안과 화목의 호수에 닿았다. 여행자의 매일 매일이 휴일일지언정 어찌 마침내 찾아온 단비 같은 주말, 그 하루의 매력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6.
 
지정된 곳을 방문할 때마다 도장을 받는 게임에 참가한 것처럼 우리는 이곳저곳 바쁘게 옮겨 다녔다. 하지만 커다란 시계탑을 보고, 900년 전에 지어진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분수 가에 둘러앉아 근위병 교체식을 기다려도 겉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주마간산식 관광은 더 나은 영혼을 끌고 다니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내 옆 내 영혼이 타인의 휴일에 손님으로라도 한 발 걸치고 싶다며 옆구리를 쿡 찌를 때, 비로소 좀 천천히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7.
 
이 층으로 되어있는 네모난 광장. 대조적인 느낌의 벼룩시장과 애플 스토어가 나란히 서 있다. 북쪽의 넓은 공터에선 묘기 실력보다 말재주가 더 좋은 차력사가 공연 중이다. 수많은 구경꾼은 깔깔대고 웃다가 그들 중 한 명이 차력사를 돕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가면 박수로 응원했다.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코벤트 가든이다. 제법 쌀쌀한데도 노천카페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광장의 각 모퉁이엔 다양한 장르의 라이브 음악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어디에서도 음악을 놓칠 일이 없었다. 거기다 구경거리도 많아 딱히 뭘 하려 하지 않아도 오감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현지인의 평범한 하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큰 소리로 떠들며 커피나 티나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내면을 향한 눈빛을 한 채 무명 가수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일행과 진지한 표정으로 커다란 모자를 고르는 사람들. 보고 있노라면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왠지 그들과 마음이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우리네가 주말을 보내는 방법도 이와 크게 다르진 않다. 우리도 술집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거나 카페의 스피커를 쳐다보며 오후를 보내거나 때때로 인사동 한복판에서 열리는 작은 연주회에 걸음을 멈춘다. 그런 사소한 경험을 좋은 방향으로 추억하는 이유로 코벤트 가든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우리와 비슷한 냄새를 맡는 것이다. 복사해서 붙여 넣은 듯한 매일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요일이 낫다는 걸 그들도 알고 우리도 안다. 평일 아침, 출근 시간에 만나는 도시인의 표정은 어느 위도와 경도에 있고 어떤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삼았는가와는 상관없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지금, 이 광장엔 얼마나 다양한 표정이 존재하는가.


8.
 
아침에 로비 앞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새소리가 들렸다. 여의도와 거의 비슷한 크기라는데 지는 해는 하이드 파크를 모두 채우고 남을 정도로 풍부한 거품을 냈다. 바람에 옷깃을 추스면서도 석양을 보면 괜히 웃음이 났다. 공원이란 곳이 항상 그렇듯,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를 건드렸다. 일 분도 오 분으로, 오 분도 십 분으로 연장하고 싶었다. 뻥 뚫린 길을 따라 반대편 입구까지 걸으면 질문도 모를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느껴졌다. 잔디 위에 벌러덩 눕는 건 어떨까. 그저 둘러보는 것과 풀 냄새를 맡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선을 긋고, 선 뒤로 물러서서 그냥 이곳의 시간이 흐르는 걸 보았다. 운동복을 입은 이들이 해를 향하여 달렸고, 한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휴식의 거대한 영토를 가로질렀다.
 


9.
 
저녁을 먹고 정말 괜찮았던 커피를 마신 뒤 식당을 나오자 도시는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식당 앞엔 거대한 몸집에 녹색 명찰을 수줍게 단 홀리데이 인의 체인 호텔이 투숙객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객실이 찰 때까지 잠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많이 막혔다. 도로 양쪽에서 돌아가는 회전식 광고판은 사람의 소비욕을 부추기고 있었다. 고가도로와 같은 높이의 투명한 건물엔 독일제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 풍경은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다행히 아군도 있었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테라스 주택과 커튼 너머로 흘러나오는 은은한 연주황색 실내등은 따뜻한 상상력으로 우리를 배웅했다. 한 주를 마감하는 시간, 식사가 조금 늦은 가정에선 막 조리한 닭고기 요리와 삶은 콩과 당근, 종류를 세분할 수 없는 빵 몇 개를 식탁에 올리고 어머니가 아이들을 부르고 있을지 몰랐다. 아이들은 포크를 집었다가 결국 손을 쓸 것이고, 냅킨은 소스와 버터를 닦아내느라 자신을 희생할 것이다. 물론 구성원이 이보다 적거나 오전 중에 불편한 싸움이 일어났던 가정에도 이 저녁은 새로운 한 주의 자양분이 된다. 한숨만 나오는 월요일이 코앞이라고 현재를 그냥 버릴 이유는 없다.
 
끝없는 자동차 행렬이 짧은 휴가를 끝내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붉은색 꼬리등을 좇다가 여행 중인 나에겐 한동안 돌아갈 장소도, 새로 시작할 시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호텔 로비는 젊은 학생들의 파티로 소란스러웠다. 정장과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그들은 런던의 일요일을 지키는 최후의 수호자들이었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짧은 하루가 두터운 문이 닫히자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canon A-1 + 24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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