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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선 인터넷 이름에 프리나 메트로가 붙은 것들은 한두 번 속고 나니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됐다. 정오가 조금 지났는데 날이 개지 않아 모어 런던은 늦은 오후의 신시가지 같았다. 묘한 얼굴을 한 철상鐵像 타워 브리지를 스케치하는 화가를 휴대전화의 카메라에 담고 무심코 설정창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헛숨이 나왔다. 드디어 나와 말이 통할 것 같은 이름 하나를 찾은 것이다. 등 뒤에 있는 시청사나 사무용 빌딩이 고향인,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부채꼴이 한 개와 두 개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예민한 녀석이었다. 시험 삼아 담벼락에 방금 찍은 사진을 올려보았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전송창이 차오르고, 지금 이 순간이 대부분 한국에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공유되었다. 시운전이 끝나자 메신저를 통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진도 보냈다. 답변은 감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왔고, 알고는 있었지만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론적으로 세상의 모든 인간은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2.
  2010
년 초에 유럽을 여행할 때도 스마트폰을 들고 갔었다. 당시엔 주변에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심비안이라는 주류 아닌 주류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모델이었기 때문에 쓸 만한 모바일 메신저도 없었다. 더군다나 여행 중에 나의 현재 상태를 공개할 필요도 느끼질 못했다. 눈앞의 풍경과 나를 둘러싼 분위기,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된 감정 따위를 반죽하여 변덕스런나 자신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결국 내 휴대전화는 대중교통 검색을 전담하며 때때로 인터넷 전화를 거는 소일을 맡게 되었다. 덕분에 완전한 단절은 아닐지라도 내가 있던 사회에서 파편처럼 떨어져 나왔다는 후련함과 그 이면의 외로움을 골고루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인심 좋은 장소를 찾거나 통신사에 데이터 사용료를 추가로 지불하면 방금 연주를 마친 길거리 악사의 공연을 팔천 킬로미터 밖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그것도 고화질 동영상으로, 거의 시차도 없이.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은 기술적인 가능성보다 전자회로 너머의 세상을 현실만큼이나 익숙하게 여기게 된 사고의 변화다.


 
방금 올린 타워 브리지 사진에 사람들은 빠르게 댓글을 달고 엄지손가락을 올린다. 마음만 먹으면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시한 채 친구들과 문자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잔뜩 멋 부린 외모와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 애인과 영상통화를 할 수도 있다. 어딜 가도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유리될 일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어딜 가도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3.
 
리젠트 스트리트에 있는 한 음식점 앞에서 선명한 신호가 잡혔다. 사람들은 일본요리를 고르느라 바빴지만 내 관심은 온통 인터넷 전화에 쏠려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유럽 전역으로 배달 주문도 할 수 있는 이 체인 레스토랑은 음식에 전혀 손을 안 댄 사람들까지 마음껏 무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통 큰 친구였다. 인도 한복판, 서둘러 갈 길을 재촉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국제 전화를 했다. 통화 연결은 매끄러웠다. 음질도 뛰어났다. 갑자기 기대에 부푼 건 나뿐이라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만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고 말았지만.
 
그러나 상대방의 반응에 철렁 내려앉은 가슴과는 상관없이 집착엔 관성이 붙었다. 어딜 가든 수시로 무선 인터넷을 찾고세상을 향해가 아니라세상의 반대 방향을 향해 메시지를 날렸다. 소셜 네트워크에 일거수일투족을 중계하는 지경까진 가지 않았지만, 내가 떠나온 곳과 보이지 않는 끈을 연결하여 종이컵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얇은 실을 타고 오가는 미약한 진동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코벤트 가든에서 (애플의 공식 대리점이라는) 무선 인터넷의 천국을 발견했다. 이곳은 어딜 가도 디자인과 구조가 비슷해서 이국적인 느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서울, 런던, 호놀룰루(내가 애플 스토어를 방문한 적이 있는 세 군데의 도시) 어디에서든 갑자기 자신이 있던 곳을 떠나 다른 세상에 마련된 단일한 공간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의 휴대전화는 고향에 왔음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즉각 네트워크에 연결했다. 두 번째 인터넷 전화를 걸며 나 역시 이 거대한 사과 제국의 일원임을 실감하고 멋쩍어졌다. 이런 소속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기계와 그것이 작은 로고를 통해 일궈내는 이미지, 그리고 의식할 새 없이 이뤄지는 소비에 내가 완전히 길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다른 종류 다른 상표의 제품을 사용할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주인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에게 주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4.
 
물론 양해를 구할 수는 있다. 낯선 이와 함께 여행한다는 처지. 아무리 시선을 주고 카메라를 들이대도 완전히 관광객의 색깔로 변한 카멜레온처럼 누구 하나 관심을 둬 주지 않는다는 고립감. 그리고 내 옆에 있었어야 하는 사람의 부재. 무시할 수 없는 조건들이다. 여기엔 익숙한 것에 대한 집착을 변명할 여지가 있다. 최소한 그렇게 위안 삼을 수 있는 빌미는 제공한다. 그러나 나는 외로움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엉뚱한 공정 라인을 쓰고 있었다.


5.
 
많은 여행 서적의 저자들은 글머리에서 얘기한다.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 위안을 얻기 위해, 또는 변화를 갈망하는 마음을 쿡 찌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고. 어떤 이유에서든 혼자가 될 필요를 느껴 현관에 부재중 문걸이를 달았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지금까지 알아왔던(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아니라 낯선 인물이나 저 같은 떠돌이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들은 외딴 영혼이 되고자 했다.
 
이런 심리 자체는 나와 거리가 있다. 첫 여행기를 쓸 때도나는 여행에 환상이 없다는 문장으로 운을 뗐으며, 여행을 일상의 연장으로 보는 게 낫다고 얘기했었다. 경험이 쌓이면서 시각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도 기본적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메시지에 중독된 일상이 여행지까지 이어지는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혼자가 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정확힌 그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감성은 진부하지만, 떠나도 떠난 게 아닌 상태 역시 남세스럽긴 마찬가지다. 글과 사진으로 사람을 움직일 줄 아는 여행자라면 애초에 휴대전화를 들고 비행기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6.
 
기술은 작지만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제 무거운 여행안내서와 펼치는 순간 접는 법을 잊어버리는 지도를 대신해 론리플래닛과 구글맵 애플리케이션이 당신을 인도할 준비를 하고 있다. 큰마음 먹고 고향에 안부 전화를 걸 필요도 없고, 나의 부재가 나의 존재를 잊히게 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두 눈 대신 카메라 LCD를 통해서만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누를 범하는 것처럼 당장 이 순간에 음미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혼동하는 일도 잦아지겠지만 말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와이파이를 찾느라 신경을 곤두세우는 버릇은 시들해졌다. 사람이 익숙해지고 외로움이 편해졌을 즈음이었다. 여행에 길이 든 시점이었다. 지금보다 물리적 거리의 장벽이 높았을 땐 여행자가 느끼는 고독이 더 진한 빛깔을 띠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때의 감정이 지금보다 더 풍부하게 출렁였을 것이다. 여행이 일상의 연장선에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가져가선 안 될 것들을 구분하고 그것을 놔두고 갈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평소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다녀 무감각해진 우리가 여행 중 하늘이라도 한 번 더 쳐다보기 위해선 일부러라도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canon A-1 + 24mm

흑백 사진은 iPhone4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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