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까요. 그냥 올려다보았을 뿐인데요. 서 있는 땅이 다를 뿐 어차피 하늘은 한 배에서 자란 껍질처럼 우리를 덮고 있을 뿐인데요. 푸른 계통의 상석上席, 한두 방울의 농도가 더해졌을 따름인데 무심코 손을 뻗고 맙니다. 때로는 절묘하게 이웃색과 혼합해 버린 영롱한 붓질을 따라 걷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우연히 겹쳤을 뿐인데요. 세월이 가면 언제나 그랬듯 가장 먼저 색이 바랠 열정일 뿐인데요. 참으로 정수만 골라 피운 붉은색입니다. 실은 빨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눌러보라는 듯 봉곳이 도드라져 파랑을 더욱 파랗게 회색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풍경에 밑줄을 긋고, 일상에 굵은 테두리를 둘러 강조합니다. 턱없이 작아도 제 할 말은 다 해버립니다. 눈이 오지 않는 삿포로의 ..
영종대교를 따라 달리다가 매도를 지날 때였다. 땅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무릇했다. 얕은 잔디가 가을이 온다고 저도 단풍이 든 것 같았다. 쓰다듬으면 손에 물이 들 듯한 붉은 빛을 보며 절로 앞으로 갈 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곳에서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는 세상 어느 곳보다 찬란한 단풍을 보려는 데 있을 테니까. 사소하지만 당위성 있는 연상 작용에 번쩍 현실감이 들었다. 저런 붉은 잔디가 무럭무럭 자라 길을 가르고 하늘을 채우고 눈앞을 어지럽히리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도 덩달아 붉어지는 것 같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장거리 비행은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두 시간 삼십오 분. 마치 그 긴 시간을 보답해 주고 싶다는 듯 개인용..
여행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생각보다 한국에, 서울에, 일상에 적응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타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28일이 객관적으로 길다곤 할 수 없겠으나 이렇게 쉽고 빠르게 꿈이 될 줄은 몰랐다. 일주일만에 D를 다시 만나 술을 마시며 "우리 갔다왔던 거 맞지?"라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랬다. 그랬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의미가 떠나기 전보다 더 희미해졌다. 여행의 기억이 그러했듯 현실도 수면 아래 세상처럼 흐릿해졌다.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온 건 음식이었다. 여행 중에는 달고 느끼한 그곳의 음식이 맞지 않았는데, 이젠 맵고 짠 한국의 음식이 맞지 않는다. 원래 짜게..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났지만 다시 잠들진 않았다. 새벽은 말근 쌀뜰물처럼 뽀얗게 빛났고 단 한 번 뿐인 여명을 저버리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 후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키보드를 펼쳤다.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D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어쩌면 이땐 거의 체념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노트를 많이 정리하진 못했다. 좀 더 아침이 묽어졌다. 샤워를 하고 짐을 싼 다음 일어날 시간이라며 D를 깨웠다. 서호에서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체크인 카운터는 열리지 않았지만 한국말을 쓰는 동향의 얼굴이 자주 보였다. 배가 고팠다. 남은 돈이 15만 5천 동이었는데 쌀국수 두 그릇에 생수 한 병을 사자 딱 맞아떨어졌다. 1천 동 하나까지 털어냈다. 직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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